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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가을호
03 	위원회 소개
	 위원회, 6·25 납북자 관련
	 청소년 교육에 나선다
04	 특별한 만남
	 전시납북자 가족들의 꿈,
	 통일의 날에야 이루어질 것인가
	 김석우 _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원장
	 전 통일원 차관
06	 가슴으로 쓴 편지
	 다시는 동족상잔의
	 아픔과 이별이 없기를
	 조정기 _ 6·25전쟁 납북자 가족
08	 특별기고
	 도라산에서 부르는 위령의 노래
	 이태영 _ 6·25전쟁 납북자 가족, 언론인
10	 그곳에 가다
	 분단의 상징에서
	 평화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다
	 임진각 평화누리
12	 기획특집
	 납북자들이 눈물지으며 떠난 이 땅에서
	 그들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도록
	 손주희 _ 위원회 사무국 기록수집팀(해외) 조사관
14	 현장 속에서 만난 사람
	 6·25전쟁 “납북 진실규명”은
	 현재진행형	
	 김수연 _ 위원회 사무국 기록수집팀(국내) 조사관
16	 아름다운 얼굴
	 납북자 가족, 60년
	 애달픈 목소리를 전하다
	 이상현 주무관 _ 강원도청 자치정책과
	 6·25 납북피해담당
17	 지금 만나러 갑니다
	 독립운동에서 통일운동까지
	 나라를 위해 살다 간 조부를 기리다
	 김수진 _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 선생의 손녀
18	 위원회 소식
6·25전쟁
납북진상규명
위원회는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사업을
추진하고
생사확인 및
송환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13 가을호
위원회,
6 25 납북자
관련
청소년 교육에
나선다
6 25전쟁이 발발한지 63년이 지난 지금 북한
에 의해 자행된 연평도 포격사건, 천안함 피
격사건, 미사일 발사사건, 핵 실험 등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지금의 청
소년들에게 바르게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다.
6 25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지금의 청소년들
은 전쟁의 아픔을 모르기에 6 25전쟁은 당
시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적화통일하기 위해
북한에 의해 저질러진 동족상잔의 비극이었
다는 것을 올바르게 알려주고, 남한의 북침
이 아닌 북한의 남침에 의한 전쟁이었다는 것
을 분명하게 인식시켜주는 교육이 반드시 필
요하다. 따라서 위원회에서는 6 25전쟁 납북
자 신고 외에도 청소년 교육을 통한 안보의식
강화를 위해서 하반기에는 참여 수업의 일환
으로 전시납북자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홍보물과 직접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가지고 다가설 예정이다.
청소년 눈높이에 맞춘
6·25 납북자 교육용 만화 제작
●
위원회가 청소년들의 6 25 납북자에 대한 마
인드 제고 및 이해를 목적으로 청소년 교육
용 만화 교재 “아빠 금방 올게”를 발간하여
하반기부터 통일교육시 활용한다.
만화 교재는 청소년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6 25납북자의 개념을 알기 쉽게 전달하기 위
해 6 25 납북자 가족이야기를 그려 납북자의
개념, 납북자가 생긴 과정, 납북자 가족의 아
픔 등의 에피소드를 통해 6 25 납북자 전반에
대해 폭넓은 이해를 돕도록 구성됐다. 6 25
전쟁이 발발한지 63년이 지나면서 청소년들
의 안보의식이 점점 무뎌지는 경향이 있어 올
바른 인식 개선을 위해 교육용 만화책을 발간
하게 되었다.
청소년들이 6 25 납북자 교육용 만화를 통해
‘6 25전쟁’ 하면 군인만 국한되어 생각되었던
개념을 북한에 의해 강제로 납치된 민간인인
6 25 납북자 이야기를 통해 북한의 인권문제
와 더불어 역사인식을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
으면 한다.
제작된 만화 콘텐츠는 위원회 홈페이지
(www.abductions625.go.kr) 및 6 25전
쟁 관련 기관의 홈페이지에 게시할 예정이다.
아울러, 만화 콘텐츠를 포함한 교육용 책자
는 통일교육시 배포 및 정보제공 등에 활용되
도록 할 예정이다.
6·25 납북자
교육 프로그램 운영
●
위원회는 하반기부터 초 중등학생을 대상으
로 무료교육 프로그램인 “알기 쉬운 6 25 납
북자 교실”을 운영한다. 6 25 납북자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어려서부터 갖춰져야 된다고
보고 성장기 아이들이 가져야 할 기본 가치와
애국심 등을 강화하는 교육을 실시한다. 청
소년들이 늘 거리감을 갖고 대했던 6 25 납북
자 이야기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해서 대학생홍보대사를 교육 강사로 활용
해 아이들에게 다가선다. 6 25 납북자 교실
프로그램은 위원회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 접
수를 실시하며, 주로 주말을 활용해 내부 참
여교육 1시간과 외부 견학 2시간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내부 교육은 납북자 관련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애니메이션 영상을 통한 교육과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려주는 납북 이야기 등
으로 구성되며, 외부 교육은 오두산통일전망
대를 견학하는 일정으로 꾸며진다.
청소년들의 나라사랑 실천은 거창한 것이 아
닌 작은 관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 실시하는 이번 교육프로그램 운영 결과
를 분석해 2014년에는 좀 더 다양하고 완성
도 높은 청소년 참여 프로그램을 시행할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할 것이다. 이에 임병철 사
무국장은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에게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알려, 올바른 국가관 확립과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도록 6 25 납북자 교육
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문명사회에서는 전시국제법상 전투중이라
도 전투에 참가하는 병력 이외의 사람들은
보호받아야 한다. 설사 포로가 되더라도 전
시에는 전투행위에서 격리시키기만 하고,
전쟁이 끝나면 원상으로 회복시키도록 하
고 있다. 과거 동양의 전쟁문화에서 포로를
매우 불명예스럽게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인간 개인의 존엄성과 권리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따라서 민간인들을 전투 중에도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기본 원칙이다. 이러한
관습법을 성문화한 것이 1949년 제네바 4
개 전시법규 중 네 번째인 전시민간인 보호
에 관한 협약이다.
특별한
만남

전시납북자
가족들의 꿈,
통일의 날에야
이루어질
것인가
김석우 _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원장 전 통일원 차관
6·25동란은 김일성이 스탈린의 지시를 받
아 불법으로 기습남침을 감행하여 일어났
다. 즉각 소집된 유엔 안보리는 이를 침략
행위로 규탄하고 격퇴하기 위해 국제연합
당사국이 참전할 것을 권고하였다. 유엔헌
장에 따라 집단적 자위권이 적용된 첫 번째
케이스가 되었다.
북한 정권은 불법적 침략행위를 범했을 뿐
만 아니라, 전투기간 중에도 수많은 전시법
규 위반행위를 저질렀다. 가장 대표적인 예
가 전시 민간인 납치행위이다. 사전에 면밀
한 기획을 통하여 국회의원, 법조인, 공무
원 등 10만 명에 달하는 민간 인사들을 납
치하여 끌고 갔다.
해방 후 공산통치를 피해서 많은 사람들
이 남하함으로써 발생한 인력부족을 메우
기 위한 것이었다.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 3천 명의 재
일교포 북송사업도 마찬가지로 북한의 산
업인력 부족을 메우기 위한 목적이었다.
왜 이렇게 문명사회에서는 당연히 보호받
아야 할 민간인들이 무자비하게 전쟁의 희
생자가 되었고, 아직까지도 원상으로 회복
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북
한 공산집단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
하기 위한 적화통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목표 추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
을 가리지 않는데 있다. 어떠한 비인도적 방
식이라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공산화
통일의 목적달성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보
기 때문이다. 북한은 십수만 명을 강제로
가둔 정치범 수용소를 유지하고, 무고한 주
민들을 적법절차 없이 공개처형이나 비밀
처형을 감행하는 최악의 인권침해국으로
지탄받고 있다. 수단이 목적을 위해서는 정
당화될 수 있다는 공산독재국가의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또한 스탈린이나 히틀
러와 같은 독재정권의 국가주권절대론을
내걸고 국제사회의 비판을 봉쇄하려 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국가와의 관계에서 개
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인권
인식이 존재하지 않았던 동양사회의 의식
구조를 고수하였다. 특히, 조선의 왕조체
제와 그 후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통치 기
간 중 인권침해를 당연시하던 의식구조는
1945년 해방 이후 북한지역에 그대로 계속
되었다. 개인의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사조
는 어디서도 자라날 여지가 없었다.
납 북 과 진 실 04. 05
이러한 북한 측의 기본 사고는 휴전협정 교
섭 중에도 계속되었다. 전시납북자 가족들
의 절규와 이를 반영한 한국정부의 요구에
따라 휴전협정 교섭에서 유엔 측 대표가 반
영시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측은 부
정적 자세로 일관하였다.
볼셰비키 혁명 후 70년 만의 공산체제 몰
락,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사회의 경
제발전과 정치민주화라는 성공 때문에 3
년간의 6 25전쟁은 전 세계적 자유민주주
의를 지켜낸 승리의 전쟁으로 역사적 평가
를 받게 되었다. 금년 7월 27일 워싱턴 한
국전쟁기념공원에서 행한 한국전쟁 휴전
협정 60주년 기념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
이 이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한국전 당시
유엔군의 주력이었던 미국사회의 당시 분
위기는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제1
차 세계대전이 1919년에 끝난 지 겨우 20
년 만에 다시 발발한 세계대전이 승리로 결
판이 났고 국제 질서는 미국 중심으로 개편
되었지만, 미국 사회 자체는 모처럼 즐기려
던 평화분위기가 깨지게 되자, 한국전에의
참전을 매우 부담스럽게 생각하였다. 휴전
후 미군들이 제대로 귀환 퍼레이드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귀국해야 하는 소위 ‘잊혀진
전쟁’이라는 분위기였다.
6 25전쟁기간 중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
에서 아이젠하워 후보는 한국전쟁의 빠른
종식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1953년 3
월 5일 스탈린의 사망을 계기로 휴전회담
을 서둘러서 종결하게 되었다. 군사적 사안
에 치중한 회담과정에서 전시납북자 귀환
문제와 같은 인도적 사안을 충분하게 논의
하지 못하고, 그들 민간인 희생자들을 물리
적으로 관리하고 있던 북한 당국의 억지 주
장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납치’라는 용어도 관철하지 못하여 회담
의제화도 하지 못하고 ‘실향민간인’의 귀향
문제를 양측의 양심에 따라 진행하기로 하
자는 공산 측 주장을 1952년 2월 3일 제52
차 회담에서 수용하였다.
휴전협정 제 3조 제 59항에 실향민간인귀
향협조위원회를 두어 실향민간인의 귀향
을 돕도록 한다는 내용을 넣고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막상 실향민간인을 귀향시
키기로 한 1954년 3월 1일 북한은 귀향을
원하는 남한 민간인은 없다며 한명도 송환
하지 않았다. 북한의 상투적인 속임수에 놀
아난 셈이다. 이승만 정부는 전시납북인사
가족회의 피 끓는 절규를 반영하여 정부와
적십자 차원의 귀환 노력을 하였으나 남북
대결 분위기 속에서 절벽 같은 북한의 대응
을 극복할 수가 없었다.
박정희 정부에서도 이 문제를 절실한 과제
로서 남북 적십자회담과 같은 창구를 통해
해결을 시도하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
다. 그 후 이어진 역대 정부에서 남북 간 대
결구도 속에서 전시민간인 납북 문제는 점
차 우선순위에 밀리게 되었고, 심지어 미전
향장기수를 북한에 송환시키면서도 이런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지 않았다. 햇볕정책
시기에도 전시납북자 문제는 정책의 우선
순위에서 후순위를 차지했다. 한국사회 자
체가 북한의 무자비한 인권무시와 비교하
면 천양지차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역시
동양적 문화에서 개인의 존엄성이나 권리
의식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적 분
위기가 전시납북자와 그 가족들이 겪는 피
해와 고통을 함께 공감하지 못하는 냉담함
을 낳은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사회의 지식인들이나 공직자들은 그
들의 부작위로 인해 전시 납북자와 그 가족
들의 고통이 연장 되고 있는데 대한 책임감
을 통감해야 한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2000년 11월 다시 결성한 6^25전
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회원 여러분의 노
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
시납북자 가족들이 겪는 피해와 북한의 인
권유린을 국내외 알리기 위한 많은 노력과
더불어 동양사회의 인권후진성을 극복하
는 시민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이다.
그들 가족들의 피맺힌 절규와 호소를 통해
2010년 3월 「6 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제
정 공포되었고, 이에 따라 6 25전쟁 납북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가 설립
되어 전시납북자들을 위한 진상규명 및 명
예회복(기념관, 추모탑 건립, 교육 및 학술
활동지원, 위령제 행사 지원 등)사업을 추
진하고 있다. 여기에 적극 참여해준 김무성
의원, 박선영 의원 등 공동 발의자들의 노
력을 높이 평가한다. 전시납북자 가족들의
소망이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들의 부모형
제가 세월이라는 중력에 견디지 못하고 세
상을 떠나기 전에 혈육들을 재회하고 결합
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북한의
참혹한 인권유린 실태를 조용히 분석하다
보면, 아마도 통일의 날에야 전시납북자 가
족들의 60년 동안 기다린 꿈들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나는 6 25사변 당시 25세로서 결혼 6년째 되던 해였다. 아들 둘, 딸 둘을 낳아
사남매를 키워오던 중이었다. 2층집에 살던 우리는 상당히 부유한 편으로 이웃
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한 가정이었다. 남편은(당시 36세) 경찰청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신문기자로도 활동하고, 청년단장으로도 활동하면서 바쁘게 살아
왔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밖에서는 비행기 폭격소리며 을지로 대로변으로 내달리는
탱크 소리며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층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남편을 피신시킬 요량으로 대화를 나누던 중 남편은 내가 무슨 죄인이냐며
피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서재에 머물렀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니 당시 내무부장관의 비서로, 남편과 친분이 있던 고비서라는 분이 찾아와 2
층으로 올라갔다. 몇 분 후 또 다른 여자가 와서 방금 한 남자가 이 집에 들어갔
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양해도 없이 이 여자가 뒤따라 올라가 잠시 후 세
사람이 내려왔다. 남편에게 어디를 가냐고 물으니까 다방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하고 나갔다. 몇 분 있다 또다시 6~7명 정도 되는 인민군들이 집으로 들어와서
총부리를 내 가슴에 대고, “네 서방이 조병권이지?” 하면서 서방을 찾아내지 않
으면 가족을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공포에 떨던 중에 또 다른 인
민군이 들어오더니, “조병권 잡았어!” 하면서 그 일당이 온 집안을 뒤져 집안에
있는 세간 전부, 골동품 및 가재도구, 심지어 수저마저 트럭에 싣고 가 당장 먹을
그릇 하나 없었다.
그 후로 2주쯤 지났을 때, 지게를 진 나이 지긋하신 분이 우리 집을 찾아와서는
나에게 편지를 전해주셨다. 남편의 편지였다. 남편은 편지에 ‘지금 내가 서대문
형무소에 있는데 배가 너무 고프고 옷도 필요하니 준비해서 서대문형무소로 오
라.’며 ‘얼마 있으면 나가게 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어머님과 아이들 깨끗하
게 잘 키우고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을지로3가 집 뒤편 하원시장에 가서 떡 등 이것저것을 샀다. 서대문형무소가 어
딘지도 몰라, 물어물어 가다가 광화문을 막 지나려는데, 남편과 알고 지내셨던
분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갈 필요 없다고 했다. 만약
가게 되면 아주머니도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니 가지 말라는 얘기를 하면서 조금
전에 트럭에 모두 싣고 어디론가 갔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좌익으로서 나에게
거짓으로 한 말임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가슴으로 쓴
편지

다시는
동족상잔의
아픔과 이별이
없기를
납 북 과 진 실 06. 07
6 25전쟁 납북자 가족
조정기
당시 그 사람 말만 믿고 발길을 되돌려야만 했던 것, 그래도 서대문형무소까지 가
서 남편의 상황을 못 알아본 것이 63년이 지난 오늘까지 뼈에 사무치듯이 아쉽고
원망스럽게만 느껴진다.
그 후 시어머님은 화병으로 중풍까지 오게 되어, 시어머님 병시중부터 사남매와
부산으로 피난길에 올랐다가 서울로 돌아와서는 오라버님 집에 들어가 신세를 지
게 되었다. 그 와중에 시어머님은 시력까지 잃게 되면서 합병증세로 세상을 떠나
시고, 나는 아이들과 먹고 살 일들을 고뇌하며 살아오면서 여자로서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어린 자식들을 떼어놓고 버스 안내양들 합숙소에서 살며 돈을 벌었고, 건설현장에
서 함바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중앙산업건설 회사(종암동에 위치) 뒷산에 돌산을
폭파한 돌을 무거운 망치로 잔돌로 깨어내는 일도 했다. 여자로서 감당하기 힘들
었지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일념 이외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지 아이들을 잘 키워보자는 생각으로 궂은 일 가릴 것 없이 살아왔다.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청소하는 일을 시작했을 때는 제기동 집에서 서울운동장까지 4km를
차비도 아끼느라 아침, 저녁으로 걸어서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육체적으로 피곤했다. 걸어서 집에 와 아이들 밥을 먹이고 나면 몸이 파김치
가 되었다. 잘 때면 팔다리가 아파지고 온몸에 경기마저 왔지만 그래도 혼자 참아
야만 했다.
아이들에게 혹시라도 심적 부담을 줄까봐, 밖에 나가서 기죽을까봐 건강한 척 살
아왔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몸이 천근만근이었고, 밤에 자다가도 온몸이
쑤시고 팔다리가 저릴 때엔 이러다가 죽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이들은 어떡
하나, 그나마 내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시 잡고 살아온 세월이 어
느새 내 나이 88세. 이제 증손자까지 보았으니 그저 아프지 않고 밤에 자는 듯이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망이다. 또한 다시는 6 25와 같은 전쟁으로
10만여 명의 선량한 국민이 납치되고 동족상잔의 아픔과 이별을 느끼는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드린다.
다시는 6·25와 같은
전쟁으로 10만여 명의
선량한 국민이 납치되고
동족상잔의 아픔과
이별을 느끼는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드린다.
특별 기고

이 땅의 포성이 멎은 지 60년, 오늘
도 임진강은 무거운 정적(靜寂)에 잠겨 있
다. 무성하게 자란 숲은 동물들의 낙원이
되었지만 파묻힌 생명은 말이 없다. 자유
롭게 하늘을 나는 새들은 남과 북을 넘나
들며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그보다
임진강에 이르기까지 높고 낮은 봉우리의
DMZ초소엔 여전히 전쟁 상황이나 다름없
는 긴장이 흐른다. 정전 60주년을 맞은 지
난 7월 26일 남북분단의 현실을 실감케 하
는 도라산역에서 의미 있는 평화콘서트가
열렸다. 6 25참전 21개국 뮤지션들이 펼친
이 음악회에 초대받은 수백여 각국 참전용
사들은 한결같이 감탄을 터뜨렸다. ‘끝나지
않은 전쟁’의 깊은 상흔과는 달리 아름답게
가꾸어진 평화로운 모습, 그보다 폐허를 딛
고 일어선 대한민국의 번영, 이 여러 장면이
오버랩되어 어쩌면 머리가 어지러웠을지
도 모른다. 평화콘서트는 진혼(鎭魂)음악제
와 다름없었다. 전쟁 피해와 관계없이 대한
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하늘에 바치는 어
떤 구원의 노래를 불러야 마땅할 터. 너무
슬퍼서 너무 아름다운 ‘비목(碑木)’은 그래서
전쟁희생자의 위령(慰靈)기도이기도 하다.
우리가 북한 노래인 ‘임진강’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는 것도 휴전선을 뛰어 넘는 영
혼의 갈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도라산에서
부르는
위령의 노래
이태영 _
6 25전쟁 납북자 가족, 언론인
납 북 과 진 실 08. 09
이러한 목마름은 6 25전쟁 납북인사 가족
들에겐 더욱 간절하게 다가온다. 이때가 되
면 가족들은 임진강을 바라보며 목 놓아 울
고만 싶다. 허공으로 사라지듯 행적을 확인
할 길 없는 납북인사들, 60년의 세월을 훌
쩍 넘겨 후손의 한(恨)은 더욱 깊어만 가는
현실에 가슴 답답할 뿐이다.
그 가족의 한사람인 나는 20여 년 전 오랜
울화병으로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 묘소를
북한 땅을 내려다보는 임진강변 언덕에 모
셨다. 슬픔을 안은 채 말 없이 흐르는 강물
위에서 두 분의 영혼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이 하늘과 이 땅에 사
랑과 정의가 살아있다면, 그보다 세계가 진
정 평화를 갈구한다면 어찌하여 지구상의
유례가 없는 이러한 비극을 지켜보고만 있
는지 따져 묻고 싶다.
나는 납북되신 가친(독립유공자 이길용 기
자)이 6^25전쟁 발발 3년 전 동아일보 특
파원으로 남북분단의 현장을 돌아본 38선
르포기사를 뒤늦게 찾아내 생생한 증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남북분단의 희생
자가 되리라고는 비극적 운명을 어찌 알 수
있었으랴.
‘단장(斷腸)의 38선, 비애의 교향곡’이라는
제하의 기사내용 일부를 옮겨보면
엄동설한은 무섭게 닥쳐오건만 아직도 풀
릴 줄 모르는 38선 철의 장막은 피로 물든
채 비극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
한 원한의 38선을 좀 더 똑바르게, 속속들
이 훑어보며 남북으로 갈라진 동포들의 실
상을 살피기 위해 서쪽 분계선. 개성으로
부터 옹진(甕津)대안의 팔학(八鶴)까지 돌아
보았다. 3월이라 3짓날 기어 들어갔다가 9
월 9일에 되돌아가는 제비도 이 하늘의 창
공을 자유로이 날건만 원수의 38선 남북
의 글월을 미소(美蘇) 양군의 입회아래 주고
받는 안타까운 현실이 가슴 아플 뿐이다.
개성(開城)은 송악산(松嶽山) 중턱부터 38선
이라 서쪽으로 12km, 동쪽으로 3km, 모
두 40여리를 접하고 있는데 그중 가까운
곳은 불과 400m 사이에 남북이 대치하고
있다.
이곳 수용소의 수용능력은 3,500명으로
그동안 이 수용소를 통하여 이남 땅에 퍼
진 이가 7만 명에 이르는데 많을 때는 1천
명을 넘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시작되는
피난민 생활의 비극도 그러 하려니와 가족
해산을 겪는 아픔을 어떻게 필설로 표현하
리오.
그 비극의 한 토막.
모자가 함께 월경하다가 보안대에 들켜서
도망하는 사이에 걸음 느린 어머니는 잡혀
가고 13살짜리 아들만 어머니를 찾아달라
고 울며 또 울며 몸부림치는 비극에 눈물
이 옷을 적셔 눈을 감아야 했다.
38선에서 가장 위험한 지대로 알려진 여
현(礖峴)에 이르자 다섯 자 길이의 검은 말
뚝이 눈에 띈다. 남쪽으로는 영어로, 북쪽
으로는 러시아 글로 적혀 있다. 이것이 반
만년 기나긴 세월에 걸쳐 배달혈통을 이어
온 우리 겨레, 이 삼천리강산을 두 쪽으로
갈라놓은 38선 패목이 될 줄이야 누가 알
았으랴. 통한의 슬픔에 몸서리 쳐진다.
틀림없는 우리 강산, 붉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우리 땅이건만 어찌하여 저쪽은 붉
다하고 이쪽더러 희다고 하는고. 소련병사
몇 명이 빨래 널린 막사 앞을 거닐며 이쪽
을 노려본다. 우러러 저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시름 잠긴 터에 하늘마저 애처로운
듯 흐려지니 우로(雨露)의 은택에 고이 자란
같은 겨레의 발길이 끊어짐을 한탄하며 경
계를 뛰어 넘어 마주 껴안고 넉두리라도 하
고 싶다. (중략)
38선의 새벽은 유난히 음산하고 차다. 서
글픈 해주만엔 햇살조차 비켜가는 듯하
다. 또 하나 비극의 한 토막. 함경북도 회령
(會寧)에 원적을 두고 나남(羅南)에 살고 있
는 박정애 여사가 앞서 월남한 가장을 찾
아 일곱 살 난 아들을 등에 업고 보찜은 머
리에 인 채 달 밝은 밤을 틈타서 해안으로
월경하여 팔학 마을에 다 달은 것이 26일
새벽, 주막을 찾아 등에 업은 아들을 내려
놓고 보니 어린 것이 해안추위를 이기지
못해 얼어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오-죄
없는 어린 혼이여. 운명하기 전 얼마나 고
통스러웠을 것이며 얼마나 신음하였으랴.
모진 바람, 바다 물결소리에 이런 비극도
모르고 남쪽으로 바쁜 발걸음을 달렸으니
어머니의 그 애통함을 어이 하리.
해주(海州)는 소래포에서 바로 바라보인다.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그 벌판에 소련 전투
기 상당수가 정렬해 있다. 그 뒤로 제련공
장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른다. 마
치 전쟁의 전주곡(前奏曲)과도 같은 험악한
분위기다. 수양산(首陽山)아 말 물어보자.
해주의 고금(古今)을 네 응당 알지니 예는
그만두고 라도 38선으로 갈라진 해주의
슬픈 운명, 고달픈 살림살이에 앞날이 아
득하다.
남북 간의 무력충돌을 예감하는 예리한 관
찰에 감탄을 금할 길 없다. 그리고 순교자
정신과도 같은 기자정신에 엄숙함을 느끼
게 된다. 납북 이후 그 분의 행적을 아는 이
는 아무도 없다. 세계기자협회를 통한 노력
도 모두 허사였다. 다만 피랍 중 어느 곳에
서도 그 분의 동향을 확인할 길 없었다는
평양탈출 동료기자의 증언이 있었다.
이러한 민족의 비극은 더 이상 지속되어서
는 안 된다. 그 희생자의 가족들, 더구나 2
세들이 목숨을 다하기 전에 그 한을 풀 수
있게 되기를 갈망할 뿐이다.* 이길용 기자 부부
* 이길용 기자
그곳에
가다

분단의 상징에서
평화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다
아픔과 한의 공간에
치유와 희망을 품다
●
2005년 세계평화축전을 계기로, 남북 대립
의 긴장이 흐르는 분단과 냉전의 상징이던
임진각을 화해와 상생, 평화와 통일의 상징
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조성한 3만평 규모
의 평화누리공원을 조성하였고, 임진각 또
한 새단장을 하여 2009년 새로운 모습으
로 다시 문을 열었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 실향민들의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건립된 임진각의
무겁고 차가운 분위기는 모던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관광명소로 바뀌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임진각 건물 안
에는 기념품점과 식당, 카페가 있어 임진각
평화누리의 풍경을 감상하며 휴식할 수 있
으며, 옥상에서는 전망대를 통해 민간인통
제구역 마을인 해마루촌 등을 바라볼 수 있
다. 임진각 건물을 나서면, 수천 개의 바람
개비가 통일과 평화의 열망을 품고 매일 새
로운 바람을 맞이하며 서있는 바람의 언덕
을 만날 수 있다.
임진각 평화누리
납 북 과 진 실 10. 11
사진자료제공 _
임진각 평화누리
(031-956-8300)
이제는 임진각의 상징이 된 바람의 언덕은
탁 트인 넓은 하늘과 푸른 잔디, 그리고 아
름다운 미술작품들로 관광객들에게 휴식
과 여유를 선물한다. 공원 안에 위치한 연
못 위에는 수상카페가 떠 있어 연못 주변의
바람개비들을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도 있
고, 야외공연장에서는 다양한 문화예술 공
연으로 관람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또,
평화랜드에는 다양한 놀이기구를 갖추고
있어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의 가벼운 여
행지로도 사랑받고 있다.
아직도 살아있는
분단의 역사를 곱씹다
●
평화의 상징으로 변신했다고 해서 임진각
의 역사와 의미 속에 새겨진 과거의 아픈
기억까지 지워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분단
된 한반도의 현실과 역사를 안고 있는 임진
각 평화누리에는 잊지 못할 과거의 기억들
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1953년 전쟁포로 교환을 위해 가설된 자유
의 다리가 이곳 평화누리공원 한 켠에 남아
있다. 당시 경의선 철교까지 차량으로 옮겨
져 온 포로들이 이 다리를 걸어서 넘어 돌
아왔다고 하는데,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유의 다리는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채 아
직 돌아오지 못한 용사들과 납북된 가족들
의 귀환을 기다리며 서있다. 자유의 다리
아래에는 한반도 모양의 통일연못이 있어
분단된 국토의 통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
각해보는 시간을 제공한다. 또 이곳에서는
임진각철교가 바라다보여, 도라산역으로
향하는 열차를 바라볼 수 있다.
자유의 다리와 임진각 건물 사이에는 매년
명절이면 흩어진 가족을 생각하며 모여든
사람들이 북녘 땅에 두고 온 부모와 형제,
조상들을 향해 배례를 올리는 망배단이 자
리하고 있어 이산가족들과 망향자들의 애
달픈 가슴을 달래준다.
또, 임진각 평화누리에는 경의선 증기기관
차 전시장이 있다. 이곳에는 한국전쟁 중
폭격을 맞아 멈춰버린 기관차 한 대가 당시
의 그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며 선채 그
날의 참상을 증명하고 있다.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는 문화재 78호로 지정되어 전
쟁의 아픔을 모르는 후세에 평화와 통일의
염원과 희망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한민족 공통의
염원에도 어느덧 60여 년의 세월이 덧입혀
져, 이제는 통일비용을 따지며 유불리(有
不利)를 논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시대가
되었다. 임진각 평화누리에 남겨진 역사의
교훈을 다시금 돌아보며 비용계산으로는
따질 수 없는 평화와 생명, 그리고 가족의
의미를 한 번쯤 되새겨 보는 것도 좋겠다.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임진각은 그러한 대한민
국의 현실을 냉엄하게 보여주는 분
단의 상징이자, 냉전시대의 상징과
도 같은 곳이었다. 임진강 너머 북
녘 땅을 바라보며 망향과 이산의 한
을 달래 온 지 어언 60여 년, 이제
이곳은 평화를 염원하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 일반 시민들의 일상 속
쉼터로도 각광받고 있다.
올해로 6 25전쟁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이
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6 25전쟁의 연
대기를 채우기에는 많은 의문부호들이 존
재한다. 특히 민간인 납북사건과 관련하여
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전시납북피
해사건을 규명하는 것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국가적 과업이다.
납북정황 파악을 위해 전쟁 중 작성된 기록
을 조사하고 발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전쟁의 포화 속에서 이미 많은 국내
의 기록들이 사라졌다. 그렇기에 손실된 국
내 기록의 공백을 보완하고 납북사건에 대
한 국제적인 공신력, 객관성을 제고하기 위
하여 국외기록의 조사, 발굴이 필요하다.
낡은 문서 한쪽에 적혀 있을지 모르는 납
북 희생자 이름 석 자를 찾아, 그리고 역사
의 뒤안길에서 사라진 희생자들을 추모하
는 기념관 조사를 위해 지난 7월 6일 미국
출장팀은 워싱턴 D.C.행 비행기에 몸을 실
었다. 11박 13일 동안 미 국무부, 국립문서
기록관리청, 국방부 한국전쟁기념관, 육군
역사연구소 박물관을 포함하여 3개 주를
넘나들며 13여개 기관을 방문하는 숨 가쁜
일정이 시작되었다.
20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여러 민
족이 모여 만들어진 미국이라는 국가에 대
해서 국가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역사와 기록을
충실하게 유지 관리해온 것이라고 한다.
기획
특집

납북자들이
눈물지으며 떠난
이 땅에서
그들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도록
손주희 _
위원회 사무국
기록수집팀(해외) 조사관
다양한 인종적, 역사적 배경을 가진 민족으
로 구성된 이민자들의 땅이기에 미국인들
은 자신들의 뿌리를 발견하고 인지하는 것
을 중요시한다. 또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
기 위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 중인 그랜
드전략의 중심에는 역사기록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프로젝트가 그 기반으로 자리
잡고 있다. 투명하고 체계적인 역사 보존
방식과 더불어 국민들의 알권리를 보장하
기 위한 정보공개법(Freedom of Information
Act), 의무적 정보공개요청제도(Mandatory
Declassified Request) 등도 활성화되어 있는
데 이는 미국 국민뿐 아니라 외국인들까지
도 미국정부의 비공개 기록에 대해 공개 요
청을 할 경우 관련 정보 검토를 통해 공개
토록 하는 법안이다.
미국의 역사와 기록에 대한 인식과 정책
은 실제로 인상적이었다. 출장 중 미 국무
부를 방문해 한국과, 정보공개과(FOIA),
* 미 국무부
납 북 과 진 실 12. 13
역사과, 국방부 전쟁포로실종국 관계자들
과 면담을 통하여 전시납북사건 진상규명
의 중요성에 대하여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납북관련 자료수집을 위한 정보공개의 효
율적인 프로세스 협력 등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500여개의 연방정부기관과 50개
주정부에서 작성한 주요 기록 문서들을 보
관하고 있는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에는 약 1억 2천여만 건 이상의 정부 기록
물 등이 보존되어 있다.
이 기록물들은 미 국무부 ‘국’단위 기록관
리 체계인 RG(Record Group)라고 명시되는
500여개의 RG 그룹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전시납북사건 관련 기록은 RG 59(미 국무부
문서군), RG 554(미 극동군사령부, 유엔군 총사령부
문서군), RG 263(CIA 문서군) 등 수십개의 문
서군에 일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전시 중 남한민간인 납북사건은 미
국의 중대 관심사가 아니었으므로 관련기
록을 찾아내는 것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출장 기간 중 NARA에서 자료수
집을 하며 실제로 방대한 양의 문건을 뒤져
납북정치인들과 관련한 북한방송 녹취록,
북한의 남한 점령시기 동안 시민들의 징집,
북송에 관한 기록 등 일부를 찾아낼 수 있
었다. 납북관련 자료 발굴에는 어려움이 컸
던 반면, 6 25전쟁에 참가한 미군 참전자에
관한 기록은 체계적으로 기록 보존되어 있
었다.
북측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미군 전쟁포
로가 본국에 보낸 서한, 미군 실종자 가족
들이 미국 정부에 소송하는 개별 소송파일,
미군 포로들의 수기를 묶은 책자 등 방대한
양의 자료가 개개인별로 세밀하게 보존되
고 있었다. 납북 관련 기록도 그와 같이 체
계적으로 보존되면 참 좋았으련만 하는 부
러움과 안타까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6 25전쟁은 미국에게도 큰 의미를 갖는 전
쟁으로 기억된다.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미 국방부 청사에 설립된 한
국전쟁기념전시관은 그 규모나 전시품 등
이 주변에 있던 타 전쟁기념관보다도 더욱
돋보였다.
연간 25만여 명이 참여하는 미 국방부 투어
에 한국전쟁기념전시관도 포함된다고 하니
전 세계인들에게 6 25전쟁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미 해병대 박물관의 한국전쟁전시관은
100여 평의 규모로 인천상륙작전, 낙동강
전투, 장진호 전투 등에 사용된 무기, 탱크
등을 완벽하게 재현한 점 등이 흥미로웠다.
11박 13일의 미국 출장을 통해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은 바로 역사 기록의 중요성에 관
한 것이었다. 기록은 한 나라가 밟아온 흔
적이며 역사 그 자체이다. 우리 위원회에서
하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러한
역사 기록을 조사하고 발굴하는 일이다. 단
편의 기록들이 모여 지난 60여 년간 과거
속에 묻혀있던 전시납북사건의 진상을 파
악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60여 년 전에 쓰인, 먼지 쌓
인 문서들을 하나씩 되짚어 본다. 역사 속
으로 사라진 납북자들의 이름 석 자를 찾
아, 그들이 눈물지으며 떠난 이 땅에서 그
들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도록 오늘도 구슬
땀을 흘린다.
* 미 육군 역사 연구소
역사의 의무는
진실과 허위,
확실과 불확실,
의문과 부인을
분명히
구별하는 것이다.
* J.W괴테
기록수집팀의 업무는 국내 및 해외 기록 중
전시 납북과 관련된 기록들을 수집해 납북
피해 및 진상규명의 증거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작업이다. 기록수집팀 합류 후 자료들
을 찾아 주로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국가기록원 등 국내 주요 기록전문기관을
대상으로 뛰어다녔다.
수집 후보로 올리고 살펴보는 자료들은 적
지 않지만, 정작 우리 위원회에 필요한 자
료들은 정말 희박하다. 6 25전쟁에 관련
된 자료들 속에서도 민간인들의 납북과 관
련된 내용이 담겨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처음엔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
게 살펴야 하나’ 하는 막막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 고무튜브 하나 달랑 낀 채로 태평
양 시퍼런 바다 한 가운데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랄까.
두꺼운 책, 파일 속에서 한 줄이라도 ‘납북’
과 관련된 내용이 등장하길 바라며 한 장
한 장 살폈다. 모래를 흔들고 흔들어 반짝
거리는 사금을 찾는 광부들의 심정이 이렇
지 않을까.
6·25전쟁 “납북 진실규명”은
현재진행형
글 _ 김수연
위원회 사무국
기록수집팀(국내) 조사관
특히 1950년대 기록들은 한 번 훑어보려면
두 배의 수고가 따른다. 낯선 세로쓰기에,
조사를 뺀 거의 모든 단어가 한자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날려 쓴 필기체로.
원본은 대부분 누렇게 변한 갱지 묶음이다.
파일 중간 중간에 먹지에 덧대어 쓴 기름
종이가 끼워져 있기도 하고 볼펜 글씨가 여
기저기 번져있기도 하다. 그렇게 빛바랜 옛
자료들을 꺼내 들추어보며, 그동안 막연히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생각했던 6 25전쟁
이 입체적으로 다가옴을 느꼈고, 그럴수록
납북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이 더 가깝게 느
껴졌다.
6 25전쟁은 생각보다 그렇게 멀지 않은 옛
날, 그러니까 내가 함께 지내고 사랑했던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20대 초반에 맞이
하게 된 사건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할아버지는 학업이 중단된 채 입대하여 전
쟁터로 나가셨고, 다행히 목숨은 건지셨지
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꿈을 접은 채 생계
를 잇는 가장이 되셨다.
현장 속에서
만난 사람

몇 해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그때 전쟁
이 안 났더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 거다’
라는 말을 자주 하시곤 했다. 자료 속에는
이러한 할아버지 세대가 살아온 시대의 이
야기가 담겨 있었다.
전쟁 중 작성된 징용 관련 문서를 펼쳐 본
적이 있다. 빼곡하게 적혀있는 1930년대
생 청년들의 이름들. 왠지 가슴이 먹먹해졌
다. 그 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쟁터에 나서게 된 것이다. 납북되신 분들
도 마찬가지다. 막 시작한 나라를 위해, 그
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땀 흘려 일하고 있었던 평범한 아
버지이자 아들들이었다. 단지 그 시대에 살
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갑
자기 전쟁을 맞이했고, 가족과의 생이별이
라는 아픔을 겪었고, 심지어는 그 아픔을
품고 한 평생을 살아야 했다.
납 북 과 진 실 14. 15
그에 비해 우리 세대는 단지 이 시대에 태어
났다는 이유만으로 ‘번성한 대한민국’ 속에
서 자유와 안전을 누리고 있다. 앞 세대들
이 아픔 속에서도 땀 흘려 일구어놓은 나라
에서 말이다. 우리가 그때 태어났다면 어땠
을까.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하는 가족이 사
라졌고, 다양한 이유로 오랜 세월 동안 아
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앞 세대들이 참고 견뎌온
것처럼 그렇게 지낼 수 있었을까.
몇 달 전, 국회도서관 지하의 신문 서고에
다녀왔을 때의 일이다. 이젠 누렇게 변색되
어 바스러질 것 같은 50~60년대 옛 신문들
을 조심스레 넘겨보았다.
그 속에는 납치, 행방불명, 학살, 포로, 월
북, 부역, 간첩사건 등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사다난했던 대한민국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 한편에서는 전
쟁 중 사라져버린 남편, 아버지, 자식, 부모
를 찾는 납북 피해자 가족들의 울분과 눈물
이 곳곳에 담겨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납북’
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의 미해결 사건이다.
‘해결’에는 여전히 많은 제약들이 존재하지
만 지금이나마 국가가 이 분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작업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기록들이 더 산화되기
전에 잘 모아 엮어 기억하는 것 역시 이 분
들을 위한 소중한 작업일 것이다. 부족하지
만, 납북 피해자 분들과 그 가족들의 마음
을 담아 맡겨진 업무에 최선을 다하겠노라
다짐해본다.
아름다운
얼굴

납북자 가 족, 6 0년
애달픈 목 소리를 전하 다
이상현 _ 주무관
강원도청 자치정책과
6·25 납북피해담당
납북피해신고서에는 정리되지 않은 문장이
지만 가족들만이 겪을 수 있는 그리움과 애
통함, 그리고 그 시대에 대한 분노 등 절절
한 사연들이 담겨져 있다. 신고서가 하나
둘 늘어갈수록 60여 년 동안 말 못하고 숨
겨둔 사연도 쌓여가는 것 같아, 담당자이기
이전에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로
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2011년 처음 6 25전쟁 납북자 신고접수 업
무를 시작한것 같은데, 어느덧 접수기간 마
지막 해가 되었다. 그동안 강원도 내 납북
자 가족분들께서 신고접수를 많이 해주셨
지만 아직도 납북자 가족들의 한을 풀어드
리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시 군을 거쳐 올라온 서류들을 확인하고
조사하다보면 비록 문서 한 장이지만 그 안
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많다.
북한군에 의해 가족들의 생명이 위협당해
피치 못해 끌려가신 아버지, 자신의 실수로
납북되신 아버지 등 가족들은 아직도 그에
대한 죄책감 등에서 힘겨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특히 6 25전쟁 납북자 정의를 보면 ‘남한에
거주하고 있던~’이라는 납북요건에 해당되
는 지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을 때도 있
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6 25전쟁 이후 정
전 60주년을 맞는 현재, 납북자 가족분들
의 사연을 접하다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이산가족 문제이다. 전쟁세대도
아니고 주위의 친지 중에도 이산가족이 없
기에 평소엔 관심 갖지 않았던 부분이다.
이산가족 현황을 살펴보니 12만여 명이 넘
는 이산가족 등록자들 중 그간 벌써 5만여
분이나 돌아가셨다고 한다. 남으신 분들도
70세 이상의 고령이 많다는 사실은 공식적
인 이산가족 상봉이 없어진 현재, 이분들의
소원인 가족 상봉이 힘들 거라는 생각에 더
안타깝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부에서 이산가족 상
봉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려 이분들께서
더 늦지 않게 가족을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 생긴 것이다.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들과 가깝지만 아주
먼 곳, 이북에 있는 납북자들이 하루빨리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재회하여 그리움
과 눈물에서 행복이 묻어나오는 웃음으로
바뀔 수 있기를 바란다.우리 도의 실무위원
회 위원으로 계신 분께서 전해주신 6 25전
쟁 납북자를 잊지 말자는 물망초 배지가 생
각난다. 10만여 명에 이르는 6 25전쟁 납
북자, 그들에게 가장 큰 소망은 물질적인
무엇보다도 얼굴을 맞대고 60여 년의 그리
움과 애달픔을 토로할 그리운 가족을 만나
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전시 납북자 가족
여러분의 아픔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바라며,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마지막까지
6 25전쟁 납북피해 신고접수 업무에 최선
을 다하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납북피해신고서를 접수 받은 후 1차 조사
업무의 많은 부분을 자료검색에 할애한다.
6 25납북인사가족협의회 데이터베이스에
납북자 명단이 있을 때에는 비교적 쉽게 마
무리가 되지만 인우 보증으로 접수된 건은
보증내용만으로 판단하기에는 검토해야
될 부분이 많아 비슷한 시기나 지역 사건들
을 찾아봐야 한다. 보증서의 내용이 자세
하다면 수월하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 보증할만한 지인들도 하나둘 떠나가
고 기억마저 희미해져감에 따라 내용이 미
비하고 허술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추가로
신고인과 보증인들에게 전화조사를 할 때
는 연로하셔서 통화가 어려우신 분들도 계
시고 더 구체적인 내용을 얻을 수 없을 때
는 혹시나 납북자 인정을 받지 못할까 조바
심을 내시는 가족들을 만날 때면 걱정과 안
타까움이 앞선다.
강원도는 행정구역상 특별한 상황이 있다.
바로 미수복지역이다. 강원도에는 현재 이
북지역으로 완전 미수복지역인 통천, 회양,
평강, 이천, 김화가 있고 일부 미수복지역
으로 철원, 양구, 인제, 고성이 있다.
일부 미수복인 지역에서는 많지는 않으나
꾸준하게 신고접수가 들어오고 있고 이 지
역은 전쟁 당시 이북지역으로, 납북을 입증
할만한 자료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가장 까
다로운 지역이기도 하다.
납 북 과 진 실 16. 17
지금
만나러 갑니다

독립운동에서
통일운동까지
나라를 위해
살다 간
조부를 기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 선생의 손녀,
김수진 씨를 만나다
대한민국 역사의 첫장을 연 임시정부의 부
주석, 우사 김규식 선생은 대한제국의 교육
자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였고, 또
한 해방 후에는 갈라진 한민족의 통일운동
가이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평화로운 학문
의 길을 버리고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
겠다고 선택한 그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
의 비참한 역사속에서 3.1만세운동이 꽃필
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파리강화회의 등
외교무대에서 그나마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존경과 감사
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병자의 몸으로 납북되신 할아버지
김규식 선생의 손녀이신 김수진씨를 만난
것은 감격스런 광복 68주년을 맞은 8.15 광
복절의 바로 다음날이었다. 지난 6월, 한국
전쟁 전시납북자로 공식 인정받았다는 서
류를 보여주는 김수진씨가 5세 남짓이던
무렵 할아버지 김규식 선생이 돌아가셨다.
“지금도 어렸던 저를 예뻐해주시던 할아버
지의 모습이 기억나요. 어린 제가 보기에도
할아버지는 많이 왜소한 모습이셨어요.” 김
규식 선생이 자택에서 납치되는 광경을 김
수진씨는 크면서 할머니로부터 들었다고 한
다. “당시에 칠십이 다되신 할아버지는 병
들고 노쇠하신 상태에서 약과 죽을 드시던
상태였는데, 북에서 주요인사들을 한 차로
같이 데려갔다고 해요. 할머니가 그들에게
할아버지는 몸이 병드셔서 못가신다고 말
렸지만 그들이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억지
로 데리고 나와 끌고가는 바람에 너무 걱정
이 되어 비서를 함께 보내드렸는데, 그길로
연락이 끊겼다고 들었습니다.”
영면의 순간까지 통일을 염원한
김규식 선생
남아있는 가족들이 김규식 선생의 부음을
접한 것은 어느 일본의 기자가 북한에 갔다
가 찍은 선생의 묘소 사진을 보내주었을 때
였다. 아무런 준비 없이 병자의 몸으로 끌려
간 선생은 약 없이 오래 버틸 수 없었다.
해소, 기침과 열이 나는 상태에서 끌려가는
도중 폭격기가 오면 시궁창에 엎드려 몸을
피하는 나날을 계속해야 했다는 선생은 그
런 중에도 틈만 나면 함께 끌려간 비서의 손
을 잡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통일의 중
요성을 강조했다고 전한다. “6·25전쟁이 발
발한 그 해 9월 납북되어 끌려가던 도중,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12월에 할아버지께서
눈을 감으셨다고 들었어요.”
김규식 선생의 납북 이후 가족들도 어려움
을 겪었다고 증언하는 김수진씨는 “아버지
는 사회활동 제약이 많으셨는지 일본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생활비를 부쳐주셨습니
다.”라며 당시의 납북이란 단어조차 금기시
되던 시대의 어려움을 전했다. 또 이번 전시
납북자로 공식 인정된 것에 대해 “이제야 늦
었지만 바로잡을 것이 바로잡히는구나 싶습
니다. 진작에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
하지만, 지금 이만큼이나마 잘 살게 된 한국
에 감사하고, 모두가 노력해서 잘사는 나라
가 된 게 아니겠어요”라며 회한 어린 소회를
밝혔다. 한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꿈꾸
던 김규식선생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
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	 6·25 납북희생자
	 기억의 날 행사
6 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6 25전쟁 63주년, 정
전협정 60주년을 맞아 10만여명의 6 25납북자 및 그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한 제4회 “6 25 납북희생자 기
억의 날” 행사를 지난 6월 28일 한국언론진흥재단 국
제회의장에서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류길재 통일부
장관, 6 25 전쟁납북진상규명 법률 제정에 기여한 박
선영 前국회의원, 임병철 6 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
회 사무국장 및 전시납북자 가족 500여 명이 참석하
였다. 통일부 장관은 격려사에서 6 25전쟁 납북자가
족이 겪어온 아픔을 위로하고 6 25 전쟁 납북희생자
문제의 해결이 정부의 기본 책무이자 대북 정책의 중
요한 과제임을 설명하였다. 아울러 정부는 납북자의
생사확인과 송환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임을
밝혔다. 끝으로 납북자 가족들은 “아리랑“과 “아름다
운 나라” 고전무용을 보고 “만나야 하리”를 다함께 합
창하며 행사를 마쳤다.
납 북 과 진 실 18. 19
●	 6대 특별시·광역시
	 6·25 납북피해 사진전
위원회는 6월 17일부터 8월 4일까지 6대 특별시 광역
시 청사 내 로비를 활용하여 「6 25 납북피해 사진전」
을 순회 개최하였다. 이번 전시회에는 납북 사건을 입
증하는 각종 자료 및 납북관련 사진, 언론보도 내용 등
을 통해 국민들이 6 25전쟁 납북자에 대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해 놓았다.
또한 「6 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
예회복에 관한 법률」 제정 및 위원회 사무국 개설을 통
해 지난 3년간의 신고접수 현장, 위원회와 가족회의 활
동 및 행사 내용도 담았다.
●	 위원회 홈페이지
	 사이버 추모관 개설 ▲
“대한민국 정부가 6 25전쟁 납북자의 고귀한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정전 60주년을 맞아 6 25 납북희생자에 대한 추모의
열기와 함께 관심이 더욱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위원
회는 6월 28일 6 25 납북희생자 기억의 날에 맞춰 10
만 명의 6 25전쟁 납북자를 위로하고 추모하기 위한
「사이버 추모관」을 홈페이지(www.abductions625.
go.kr) 내에 개설하였다. 사이버 추모관 내에는 헌화
및 분향, 추모 글 남기기, 추모 동영상, 추억의 사진, 납
북자 유품 코너가 만들어졌다.
특히 헌화 및 분향 코너에는 납북자 270명의 사진이
올라가 있어 검색이 가능하며, 현재도 납북자 가족들
로부터 사진을 제공받아 지속적으로 등록을 실시하고
있다. 추모 글은 “아버님 제 나이가 64세가 되었습니
다. 아버님 얼굴조차 몰랐었던 한 살배기였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철이 난 것 같습니다. 요즘엔 아버님
을 부르며 이국만리에서 울부짖어 봅니다. 왜 이리 보
고 싶은지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영면하시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고인의 자상함과 인자함을 사진 속에서만
만날 수 있어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명복을 빕니다”
짧은 글에서부터 장문의 글까지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사연들로 가득차고 있다.
위원회
소식
6월
7월
8월
●	 KBS다큐멘터리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방영
지난 6월 24일 KBS1 TV에서 방영된 가요무대 「6 25
기획」에 이어 7월 27일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아 6 25
납북자 관련 특집 프로그램인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이 방영되었다. 전쟁 당시 가족에게 제대로 인사 한마
디 건네지 못하고 북한에 끌려간 납북자를 그리워하
며 평생을 보낸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담아냈다.
방송에는 납북자 가족인 황용균(75세), 김항태(85세),
이미일(61세), 김성호(83세), 김수진(61세) 씨 등이 출
연해 납북 당시 현장에서 납북된 상황에 대한 증언과
더불어 납북으로 인한 가족의 고통 등을 생생하게 증
언함으로써 같은 아픔을 가진 많은 납북자 가족들에
게 감동을 주었다.
이번 다큐멘터리는 6 25전쟁을 통해 우리사회에 남겨
진 아픔을 보듬는 시간이 되었으며, 국민들의 이해를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	 하반기 6·25 납북피해
	 광고 영상 제작 방영 ▶
위원회는 지난 3월 공익광고영상 “딸의 독백”편을 방
영한데 이어 9월부터는 “아버지의 머리”편을 방영한
다. 새로 제작한 영상은 이발소라는 자연스런 공간을
배경으로 머리를 깍으며 나누는 두 노인의 대화를 통
해 스토리가 전개된다. 오래된 친구인 이들은 이발사
가 대화에서 생애 마지막 바램이 납북되신 아버지를
뵙고 머리라도 한번 손질해 드리는 일이라고 하자 또
다른 친구는 금년 말 마감 예정인 납북신고를 서두를
것을 권유한다.
이번에 제작된 공익광고영상은 9월 3일부터 1개월 동
안 주요 케이블TV방송, YTN, KBS^MBC^SBS 드라
마 등 시청자가 많은 채널에 집중 방영할 뿐만 아니라
전국 주요 옥외전광판(33개소)에서도 상영한다.
위원회는 이번 공익광고영상이 6 25납북신고의 필요
성과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림으로써 납북자 신
고율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위원회는 하계휴가철 6 25 납북피해 홍보를 강화하기
위한 “3대 광역시 현장 홍보”를 실시하였다. 이번 현장
활동은 8월 3일 부산역 남포동 자갈치시장을 시작으
로 8월 10일 대구역 칠성시장 달성공원 동성로, 8월
17일 대전역 중앙시장 은행동사거리 등을 순회하며
진행되었다. 대학생홍보대사들은 각 지역 시민들을
대상으로 현장활동을 펼치면서 무더운 여름을 시원하
게 만들어 줄 6 25전쟁 납북자 신고안내가 인쇄된 손
부채를 나눠주고 카카오스토리나 페이스 북, 트위터를
활용해 신고를 적극 안내하였다.
임병철 사무국장은 “이번 지역순회 현장홍보 활동을
통해 신고접수가 미흡한 지역민들에게 많은 홍보가 되
어 신고접수가 활성화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하계 휴가철
	 대학생홍보대사 현장홍보
www.abductions625.go.kr
6·25전쟁 납북피해
가슴에 묻은 세월만큼
큰 희망을 얻었어요 !
납북피해 신고서, 가족관계증명서, 제적등본, 납북경위서
기타 납북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
국내 주소지 관할 시·군·구 방문신고
재외공관 방문신고해외
문의전화 1661-6250
2013년
12월31일
신고종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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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과진실 2013년 가을호

  • 2. 03 위원회 소개 위원회, 6·25 납북자 관련 청소년 교육에 나선다 04 특별한 만남 전시납북자 가족들의 꿈, 통일의 날에야 이루어질 것인가 김석우 _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원장 전 통일원 차관 06 가슴으로 쓴 편지 다시는 동족상잔의 아픔과 이별이 없기를 조정기 _ 6·25전쟁 납북자 가족 08 특별기고 도라산에서 부르는 위령의 노래 이태영 _ 6·25전쟁 납북자 가족, 언론인 10 그곳에 가다 분단의 상징에서 평화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다 임진각 평화누리 12 기획특집 납북자들이 눈물지으며 떠난 이 땅에서 그들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도록 손주희 _ 위원회 사무국 기록수집팀(해외) 조사관 14 현장 속에서 만난 사람 6·25전쟁 “납북 진실규명”은 현재진행형 김수연 _ 위원회 사무국 기록수집팀(국내) 조사관 16 아름다운 얼굴 납북자 가족, 60년 애달픈 목소리를 전하다 이상현 주무관 _ 강원도청 자치정책과 6·25 납북피해담당 17 지금 만나러 갑니다 독립운동에서 통일운동까지 나라를 위해 살다 간 조부를 기리다 김수진 _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 선생의 손녀 18 위원회 소식 6·25전쟁 납북진상규명 위원회는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사업을 추진하고 생사확인 및 송환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13 가을호
  • 3. 위원회, 6 25 납북자 관련 청소년 교육에 나선다 6 25전쟁이 발발한지 63년이 지난 지금 북한 에 의해 자행된 연평도 포격사건, 천안함 피 격사건, 미사일 발사사건, 핵 실험 등 한반도 평화를 위협하는 일련의 사건들을 지금의 청 소년들에게 바르게 인식시켜줄 필요가 있다. 6 25전쟁이 뭔지도 모르는 지금의 청소년들 은 전쟁의 아픔을 모르기에 6 25전쟁은 당 시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적화통일하기 위해 북한에 의해 저질러진 동족상잔의 비극이었 다는 것을 올바르게 알려주고, 남한의 북침 이 아닌 북한의 남침에 의한 전쟁이었다는 것 을 분명하게 인식시켜주는 교육이 반드시 필 요하다. 따라서 위원회에서는 6 25전쟁 납북 자 신고 외에도 청소년 교육을 통한 안보의식 강화를 위해서 하반기에는 참여 수업의 일환 으로 전시납북자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홍보물과 직접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가지고 다가설 예정이다. 청소년 눈높이에 맞춘 6·25 납북자 교육용 만화 제작 ● 위원회가 청소년들의 6 25 납북자에 대한 마 인드 제고 및 이해를 목적으로 청소년 교육 용 만화 교재 “아빠 금방 올게”를 발간하여 하반기부터 통일교육시 활용한다. 만화 교재는 청소년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6 25납북자의 개념을 알기 쉽게 전달하기 위 해 6 25 납북자 가족이야기를 그려 납북자의 개념, 납북자가 생긴 과정, 납북자 가족의 아 픔 등의 에피소드를 통해 6 25 납북자 전반에 대해 폭넓은 이해를 돕도록 구성됐다. 6 25 전쟁이 발발한지 63년이 지나면서 청소년들 의 안보의식이 점점 무뎌지는 경향이 있어 올 바른 인식 개선을 위해 교육용 만화책을 발간 하게 되었다. 청소년들이 6 25 납북자 교육용 만화를 통해 ‘6 25전쟁’ 하면 군인만 국한되어 생각되었던 개념을 북한에 의해 강제로 납치된 민간인인 6 25 납북자 이야기를 통해 북한의 인권문제 와 더불어 역사인식을 개선하는 계기가 되었 으면 한다. 제작된 만화 콘텐츠는 위원회 홈페이지 (www.abductions625.go.kr) 및 6 25전 쟁 관련 기관의 홈페이지에 게시할 예정이다. 아울러, 만화 콘텐츠를 포함한 교육용 책자 는 통일교육시 배포 및 정보제공 등에 활용되 도록 할 예정이다. 6·25 납북자 교육 프로그램 운영 ● 위원회는 하반기부터 초 중등학생을 대상으 로 무료교육 프로그램인 “알기 쉬운 6 25 납 북자 교실”을 운영한다. 6 25 납북자에 대한 올바른 인식은 어려서부터 갖춰져야 된다고 보고 성장기 아이들이 가져야 할 기본 가치와 애국심 등을 강화하는 교육을 실시한다. 청 소년들이 늘 거리감을 갖고 대했던 6 25 납북 자 이야기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이해시키기 위해서 대학생홍보대사를 교육 강사로 활용 해 아이들에게 다가선다. 6 25 납북자 교실 프로그램은 위원회 홈페이지를 통해 예약 접 수를 실시하며, 주로 주말을 활용해 내부 참 여교육 1시간과 외부 견학 2시간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내부 교육은 납북자 관련 집중도를 높이기 위해 애니메이션 영상을 통한 교육과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려주는 납북 이야기 등 으로 구성되며, 외부 교육은 오두산통일전망 대를 견학하는 일정으로 꾸며진다. 청소년들의 나라사랑 실천은 거창한 것이 아 닌 작은 관심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 실시하는 이번 교육프로그램 운영 결과 를 분석해 2014년에는 좀 더 다양하고 완성 도 높은 청소년 참여 프로그램을 시행할 수 있도록 노력을 다할 것이다. 이에 임병철 사 무국장은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에게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알려, 올바른 국가관 확립과 애국심을 고취할 수 있도록 6 25 납북자 교육 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겠다”고 말했다.
  • 4. 문명사회에서는 전시국제법상 전투중이라 도 전투에 참가하는 병력 이외의 사람들은 보호받아야 한다. 설사 포로가 되더라도 전 시에는 전투행위에서 격리시키기만 하고, 전쟁이 끝나면 원상으로 회복시키도록 하 고 있다. 과거 동양의 전쟁문화에서 포로를 매우 불명예스럽게 생각하던 것과는 달리 인간 개인의 존엄성과 권리를 존중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따라서 민간인들을 전투 중에도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기본 원칙이다. 이러한 관습법을 성문화한 것이 1949년 제네바 4 개 전시법규 중 네 번째인 전시민간인 보호 에 관한 협약이다. 특별한 만남  전시납북자 가족들의 꿈, 통일의 날에야 이루어질 것인가 김석우 _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원장 전 통일원 차관 6·25동란은 김일성이 스탈린의 지시를 받 아 불법으로 기습남침을 감행하여 일어났 다. 즉각 소집된 유엔 안보리는 이를 침략 행위로 규탄하고 격퇴하기 위해 국제연합 당사국이 참전할 것을 권고하였다. 유엔헌 장에 따라 집단적 자위권이 적용된 첫 번째 케이스가 되었다. 북한 정권은 불법적 침략행위를 범했을 뿐 만 아니라, 전투기간 중에도 수많은 전시법 규 위반행위를 저질렀다. 가장 대표적인 예 가 전시 민간인 납치행위이다. 사전에 면밀 한 기획을 통하여 국회의원, 법조인, 공무 원 등 10만 명에 달하는 민간 인사들을 납 치하여 끌고 갔다. 해방 후 공산통치를 피해서 많은 사람들 이 남하함으로써 발생한 인력부족을 메우 기 위한 것이었다.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1959년부터 1984년까지 9만 3천 명의 재 일교포 북송사업도 마찬가지로 북한의 산 업인력 부족을 메우기 위한 목적이었다. 왜 이렇게 문명사회에서는 당연히 보호받 아야 할 민간인들이 무자비하게 전쟁의 희 생자가 되었고, 아직까지도 원상으로 회복 되지 못하고 있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북 한 공산집단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현 하기 위한 적화통일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목표 추구를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 을 가리지 않는데 있다. 어떠한 비인도적 방 식이라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공산화 통일의 목적달성을 위해 도움이 된다고 보 기 때문이다. 북한은 십수만 명을 강제로 가둔 정치범 수용소를 유지하고, 무고한 주 민들을 적법절차 없이 공개처형이나 비밀 처형을 감행하는 최악의 인권침해국으로 지탄받고 있다. 수단이 목적을 위해서는 정 당화될 수 있다는 공산독재국가의 본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또한 스탈린이나 히틀 러와 같은 독재정권의 국가주권절대론을 내걸고 국제사회의 비판을 봉쇄하려 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국가와의 관계에서 개 인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인권 인식이 존재하지 않았던 동양사회의 의식 구조를 고수하였다. 특히, 조선의 왕조체 제와 그 후 일본의 제국주의 식민통치 기 간 중 인권침해를 당연시하던 의식구조는 1945년 해방 이후 북한지역에 그대로 계속 되었다. 개인의 인권과 기본적 자유의 사조 는 어디서도 자라날 여지가 없었다.
  • 5. 납 북 과 진 실 04. 05 이러한 북한 측의 기본 사고는 휴전협정 교 섭 중에도 계속되었다. 전시납북자 가족들 의 절규와 이를 반영한 한국정부의 요구에 따라 휴전협정 교섭에서 유엔 측 대표가 반 영시키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측은 부 정적 자세로 일관하였다. 볼셰비키 혁명 후 70년 만의 공산체제 몰 락, 그리고 이와 대조적으로 한국사회의 경 제발전과 정치민주화라는 성공 때문에 3 년간의 6 25전쟁은 전 세계적 자유민주주 의를 지켜낸 승리의 전쟁으로 역사적 평가 를 받게 되었다. 금년 7월 27일 워싱턴 한 국전쟁기념공원에서 행한 한국전쟁 휴전 협정 60주년 기념연설에서 오바마 대통령 이 이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한국전 당시 유엔군의 주력이었던 미국사회의 당시 분 위기는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제1 차 세계대전이 1919년에 끝난 지 겨우 20 년 만에 다시 발발한 세계대전이 승리로 결 판이 났고 국제 질서는 미국 중심으로 개편 되었지만, 미국 사회 자체는 모처럼 즐기려 던 평화분위기가 깨지게 되자, 한국전에의 참전을 매우 부담스럽게 생각하였다. 휴전 후 미군들이 제대로 귀환 퍼레이드도 하지 못하고 조용히 귀국해야 하는 소위 ‘잊혀진 전쟁’이라는 분위기였다. 6 25전쟁기간 중 치러진 미국 대통령 선거 에서 아이젠하워 후보는 한국전쟁의 빠른 종식을 선거공약으로 내걸었다. 1953년 3 월 5일 스탈린의 사망을 계기로 휴전회담 을 서둘러서 종결하게 되었다. 군사적 사안 에 치중한 회담과정에서 전시납북자 귀환 문제와 같은 인도적 사안을 충분하게 논의 하지 못하고, 그들 민간인 희생자들을 물리 적으로 관리하고 있던 북한 당국의 억지 주 장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납치’라는 용어도 관철하지 못하여 회담 의제화도 하지 못하고 ‘실향민간인’의 귀향 문제를 양측의 양심에 따라 진행하기로 하 자는 공산 측 주장을 1952년 2월 3일 제52 차 회담에서 수용하였다. 휴전협정 제 3조 제 59항에 실향민간인귀 향협조위원회를 두어 실향민간인의 귀향 을 돕도록 한다는 내용을 넣고 휴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막상 실향민간인을 귀향시 키기로 한 1954년 3월 1일 북한은 귀향을 원하는 남한 민간인은 없다며 한명도 송환 하지 않았다. 북한의 상투적인 속임수에 놀 아난 셈이다. 이승만 정부는 전시납북인사 가족회의 피 끓는 절규를 반영하여 정부와 적십자 차원의 귀환 노력을 하였으나 남북 대결 분위기 속에서 절벽 같은 북한의 대응 을 극복할 수가 없었다. 박정희 정부에서도 이 문제를 절실한 과제 로서 남북 적십자회담과 같은 창구를 통해 해결을 시도하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 다. 그 후 이어진 역대 정부에서 남북 간 대 결구도 속에서 전시민간인 납북 문제는 점 차 우선순위에 밀리게 되었고, 심지어 미전 향장기수를 북한에 송환시키면서도 이런 문제를 제대로 제기하지 않았다. 햇볕정책 시기에도 전시납북자 문제는 정책의 우선 순위에서 후순위를 차지했다. 한국사회 자 체가 북한의 무자비한 인권무시와 비교하 면 천양지차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역시 동양적 문화에서 개인의 존엄성이나 권리 의식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적 분 위기가 전시납북자와 그 가족들이 겪는 피 해와 고통을 함께 공감하지 못하는 냉담함 을 낳은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한국사회의 지식인들이나 공직자들은 그 들의 부작위로 인해 전시 납북자와 그 가족 들의 고통이 연장 되고 있는데 대한 책임감 을 통감해야 한다. 그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2000년 11월 다시 결성한 6^25전 쟁 납북인사가족협의회 회원 여러분의 노 력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 시납북자 가족들이 겪는 피해와 북한의 인 권유린을 국내외 알리기 위한 많은 노력과 더불어 동양사회의 인권후진성을 극복하 는 시민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이다. 그들 가족들의 피맺힌 절규와 호소를 통해 2010년 3월 「6 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예회복에 관한 법률」이 제 정 공포되었고, 이에 따라 6 25전쟁 납북 진상규명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가 설립 되어 전시납북자들을 위한 진상규명 및 명 예회복(기념관, 추모탑 건립, 교육 및 학술 활동지원, 위령제 행사 지원 등)사업을 추 진하고 있다. 여기에 적극 참여해준 김무성 의원, 박선영 의원 등 공동 발의자들의 노 력을 높이 평가한다. 전시납북자 가족들의 소망이 여기서 끝나지 않고, 그들의 부모형 제가 세월이라는 중력에 견디지 못하고 세 상을 떠나기 전에 혈육들을 재회하고 결합 하는 날이 빨리 오기를 기대한다. 북한의 참혹한 인권유린 실태를 조용히 분석하다 보면, 아마도 통일의 날에야 전시납북자 가 족들의 60년 동안 기다린 꿈들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 6. 나는 6 25사변 당시 25세로서 결혼 6년째 되던 해였다. 아들 둘, 딸 둘을 낳아 사남매를 키워오던 중이었다. 2층집에 살던 우리는 상당히 부유한 편으로 이웃 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한 가정이었다. 남편은(당시 36세) 경찰청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신문기자로도 활동하고, 청년단장으로도 활동하면서 바쁘게 살아 왔다.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밖에서는 비행기 폭격소리며 을지로 대로변으로 내달리는 탱크 소리며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층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던 남편을 피신시킬 요량으로 대화를 나누던 중 남편은 내가 무슨 죄인이냐며 피해야 할 이유가 없다며 서재에 머물렀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 보니 당시 내무부장관의 비서로, 남편과 친분이 있던 고비서라는 분이 찾아와 2 층으로 올라갔다. 몇 분 후 또 다른 여자가 와서 방금 한 남자가 이 집에 들어갔 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양해도 없이 이 여자가 뒤따라 올라가 잠시 후 세 사람이 내려왔다. 남편에게 어디를 가냐고 물으니까 다방에 잠시 다녀오겠다고 하고 나갔다. 몇 분 있다 또다시 6~7명 정도 되는 인민군들이 집으로 들어와서 총부리를 내 가슴에 대고, “네 서방이 조병권이지?” 하면서 서방을 찾아내지 않 으면 가족을 모두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공포에 떨던 중에 또 다른 인 민군이 들어오더니, “조병권 잡았어!” 하면서 그 일당이 온 집안을 뒤져 집안에 있는 세간 전부, 골동품 및 가재도구, 심지어 수저마저 트럭에 싣고 가 당장 먹을 그릇 하나 없었다. 그 후로 2주쯤 지났을 때, 지게를 진 나이 지긋하신 분이 우리 집을 찾아와서는 나에게 편지를 전해주셨다. 남편의 편지였다. 남편은 편지에 ‘지금 내가 서대문 형무소에 있는데 배가 너무 고프고 옷도 필요하니 준비해서 서대문형무소로 오 라.’며 ‘얼마 있으면 나가게 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어머님과 아이들 깨끗하 게 잘 키우고 있으라.’는 내용이었다. 을지로3가 집 뒤편 하원시장에 가서 떡 등 이것저것을 샀다. 서대문형무소가 어 딘지도 몰라, 물어물어 가다가 광화문을 막 지나려는데, 남편과 알고 지내셨던 분을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사정 이야기를 했더니 갈 필요 없다고 했다. 만약 가게 되면 아주머니도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니 가지 말라는 얘기를 하면서 조금 전에 트럭에 모두 싣고 어디론가 갔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좌익으로서 나에게 거짓으로 한 말임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가슴으로 쓴 편지  다시는 동족상잔의 아픔과 이별이 없기를 납 북 과 진 실 06. 07 6 25전쟁 납북자 가족 조정기
  • 7. 당시 그 사람 말만 믿고 발길을 되돌려야만 했던 것, 그래도 서대문형무소까지 가 서 남편의 상황을 못 알아본 것이 63년이 지난 오늘까지 뼈에 사무치듯이 아쉽고 원망스럽게만 느껴진다. 그 후 시어머님은 화병으로 중풍까지 오게 되어, 시어머님 병시중부터 사남매와 부산으로 피난길에 올랐다가 서울로 돌아와서는 오라버님 집에 들어가 신세를 지 게 되었다. 그 와중에 시어머님은 시력까지 잃게 되면서 합병증세로 세상을 떠나 시고, 나는 아이들과 먹고 살 일들을 고뇌하며 살아오면서 여자로서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어린 자식들을 떼어놓고 버스 안내양들 합숙소에서 살며 돈을 벌었고, 건설현장에 서 함바집을 운영하기도 했다. 중앙산업건설 회사(종암동에 위치) 뒷산에 돌산을 폭파한 돌을 무거운 망치로 잔돌로 깨어내는 일도 했다. 여자로서 감당하기 힘들 었지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일념 이외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든 지 아이들을 잘 키워보자는 생각으로 궂은 일 가릴 것 없이 살아왔다.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청소하는 일을 시작했을 때는 제기동 집에서 서울운동장까지 4km를 차비도 아끼느라 아침, 저녁으로 걸어서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육체적으로 피곤했다. 걸어서 집에 와 아이들 밥을 먹이고 나면 몸이 파김치 가 되었다. 잘 때면 팔다리가 아파지고 온몸에 경기마저 왔지만 그래도 혼자 참아 야만 했다. 아이들에게 혹시라도 심적 부담을 줄까봐, 밖에 나가서 기죽을까봐 건강한 척 살 아왔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몸이 천근만근이었고, 밤에 자다가도 온몸이 쑤시고 팔다리가 저릴 때엔 이러다가 죽는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아이들은 어떡 하나, 그나마 내가 살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시 잡고 살아온 세월이 어 느새 내 나이 88세. 이제 증손자까지 보았으니 그저 아프지 않고 밤에 자는 듯이 하늘나라로 가는 것이 나의 마지막 소망이다. 또한 다시는 6 25와 같은 전쟁으로 10만여 명의 선량한 국민이 납치되고 동족상잔의 아픔과 이별을 느끼는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드린다. 다시는 6·25와 같은 전쟁으로 10만여 명의 선량한 국민이 납치되고 동족상잔의 아픔과 이별을 느끼는 일이 이 땅에서 일어나지 않기를 기도드린다.
  • 8. 특별 기고  이 땅의 포성이 멎은 지 60년, 오늘 도 임진강은 무거운 정적(靜寂)에 잠겨 있 다. 무성하게 자란 숲은 동물들의 낙원이 되었지만 파묻힌 생명은 말이 없다. 자유 롭게 하늘을 나는 새들은 남과 북을 넘나 들며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을까. 그보다 임진강에 이르기까지 높고 낮은 봉우리의 DMZ초소엔 여전히 전쟁 상황이나 다름없 는 긴장이 흐른다. 정전 60주년을 맞은 지 난 7월 26일 남북분단의 현실을 실감케 하 는 도라산역에서 의미 있는 평화콘서트가 열렸다. 6 25참전 21개국 뮤지션들이 펼친 이 음악회에 초대받은 수백여 각국 참전용 사들은 한결같이 감탄을 터뜨렸다. ‘끝나지 않은 전쟁’의 깊은 상흔과는 달리 아름답게 가꾸어진 평화로운 모습, 그보다 폐허를 딛 고 일어선 대한민국의 번영, 이 여러 장면이 오버랩되어 어쩌면 머리가 어지러웠을지 도 모른다. 평화콘서트는 진혼(鎭魂)음악제 와 다름없었다. 전쟁 피해와 관계없이 대한 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하늘에 바치는 어 떤 구원의 노래를 불러야 마땅할 터. 너무 슬퍼서 너무 아름다운 ‘비목(碑木)’은 그래서 전쟁희생자의 위령(慰靈)기도이기도 하다. 우리가 북한 노래인 ‘임진강’을 자유롭게 들을 수 있는 것도 휴전선을 뛰어 넘는 영 혼의 갈망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도라산에서 부르는 위령의 노래 이태영 _ 6 25전쟁 납북자 가족, 언론인 납 북 과 진 실 08. 09 이러한 목마름은 6 25전쟁 납북인사 가족 들에겐 더욱 간절하게 다가온다. 이때가 되 면 가족들은 임진강을 바라보며 목 놓아 울 고만 싶다. 허공으로 사라지듯 행적을 확인 할 길 없는 납북인사들, 60년의 세월을 훌 쩍 넘겨 후손의 한(恨)은 더욱 깊어만 가는 현실에 가슴 답답할 뿐이다. 그 가족의 한사람인 나는 20여 년 전 오랜 울화병으로 세상을 떠나신 어머니 묘소를 북한 땅을 내려다보는 임진강변 언덕에 모 셨다. 슬픔을 안은 채 말 없이 흐르는 강물 위에서 두 분의 영혼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하면서… 이 하늘과 이 땅에 사 랑과 정의가 살아있다면, 그보다 세계가 진 정 평화를 갈구한다면 어찌하여 지구상의 유례가 없는 이러한 비극을 지켜보고만 있 는지 따져 묻고 싶다.
  • 9. 나는 납북되신 가친(독립유공자 이길용 기 자)이 6^25전쟁 발발 3년 전 동아일보 특 파원으로 남북분단의 현장을 돌아본 38선 르포기사를 뒤늦게 찾아내 생생한 증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이 남북분단의 희생 자가 되리라고는 비극적 운명을 어찌 알 수 있었으랴. ‘단장(斷腸)의 38선, 비애의 교향곡’이라는 제하의 기사내용 일부를 옮겨보면 엄동설한은 무섭게 닥쳐오건만 아직도 풀 릴 줄 모르는 38선 철의 장막은 피로 물든 채 비극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 한 원한의 38선을 좀 더 똑바르게, 속속들 이 훑어보며 남북으로 갈라진 동포들의 실 상을 살피기 위해 서쪽 분계선. 개성으로 부터 옹진(甕津)대안의 팔학(八鶴)까지 돌아 보았다. 3월이라 3짓날 기어 들어갔다가 9 월 9일에 되돌아가는 제비도 이 하늘의 창 공을 자유로이 날건만 원수의 38선 남북 의 글월을 미소(美蘇) 양군의 입회아래 주고 받는 안타까운 현실이 가슴 아플 뿐이다. 개성(開城)은 송악산(松嶽山) 중턱부터 38선 이라 서쪽으로 12km, 동쪽으로 3km, 모 두 40여리를 접하고 있는데 그중 가까운 곳은 불과 400m 사이에 남북이 대치하고 있다. 이곳 수용소의 수용능력은 3,500명으로 그동안 이 수용소를 통하여 이남 땅에 퍼 진 이가 7만 명에 이르는데 많을 때는 1천 명을 넘는다고 한다. 이곳에서 시작되는 피난민 생활의 비극도 그러 하려니와 가족 해산을 겪는 아픔을 어떻게 필설로 표현하 리오. 그 비극의 한 토막. 모자가 함께 월경하다가 보안대에 들켜서 도망하는 사이에 걸음 느린 어머니는 잡혀 가고 13살짜리 아들만 어머니를 찾아달라 고 울며 또 울며 몸부림치는 비극에 눈물 이 옷을 적셔 눈을 감아야 했다. 38선에서 가장 위험한 지대로 알려진 여 현(礖峴)에 이르자 다섯 자 길이의 검은 말 뚝이 눈에 띈다. 남쪽으로는 영어로, 북쪽 으로는 러시아 글로 적혀 있다. 이것이 반 만년 기나긴 세월에 걸쳐 배달혈통을 이어 온 우리 겨레, 이 삼천리강산을 두 쪽으로 갈라놓은 38선 패목이 될 줄이야 누가 알 았으랴. 통한의 슬픔에 몸서리 쳐진다. 틀림없는 우리 강산, 붉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우리 땅이건만 어찌하여 저쪽은 붉 다하고 이쪽더러 희다고 하는고. 소련병사 몇 명이 빨래 널린 막사 앞을 거닐며 이쪽 을 노려본다. 우러러 저 하늘을 바라보며 깊은 시름 잠긴 터에 하늘마저 애처로운 듯 흐려지니 우로(雨露)의 은택에 고이 자란 같은 겨레의 발길이 끊어짐을 한탄하며 경 계를 뛰어 넘어 마주 껴안고 넉두리라도 하 고 싶다. (중략) 38선의 새벽은 유난히 음산하고 차다. 서 글픈 해주만엔 햇살조차 비켜가는 듯하 다. 또 하나 비극의 한 토막. 함경북도 회령 (會寧)에 원적을 두고 나남(羅南)에 살고 있 는 박정애 여사가 앞서 월남한 가장을 찾 아 일곱 살 난 아들을 등에 업고 보찜은 머 리에 인 채 달 밝은 밤을 틈타서 해안으로 월경하여 팔학 마을에 다 달은 것이 26일 새벽, 주막을 찾아 등에 업은 아들을 내려 놓고 보니 어린 것이 해안추위를 이기지 못해 얼어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오-죄 없는 어린 혼이여. 운명하기 전 얼마나 고 통스러웠을 것이며 얼마나 신음하였으랴. 모진 바람, 바다 물결소리에 이런 비극도 모르고 남쪽으로 바쁜 발걸음을 달렸으니 어머니의 그 애통함을 어이 하리. 해주(海州)는 소래포에서 바로 바라보인다. 마음대로 갈 수 없는 그 벌판에 소련 전투 기 상당수가 정렬해 있다. 그 뒤로 제련공 장 굴뚝에서 검은 연기가 솟아오른다. 마 치 전쟁의 전주곡(前奏曲)과도 같은 험악한 분위기다. 수양산(首陽山)아 말 물어보자. 해주의 고금(古今)을 네 응당 알지니 예는 그만두고 라도 38선으로 갈라진 해주의 슬픈 운명, 고달픈 살림살이에 앞날이 아 득하다. 남북 간의 무력충돌을 예감하는 예리한 관 찰에 감탄을 금할 길 없다. 그리고 순교자 정신과도 같은 기자정신에 엄숙함을 느끼 게 된다. 납북 이후 그 분의 행적을 아는 이 는 아무도 없다. 세계기자협회를 통한 노력 도 모두 허사였다. 다만 피랍 중 어느 곳에 서도 그 분의 동향을 확인할 길 없었다는 평양탈출 동료기자의 증언이 있었다. 이러한 민족의 비극은 더 이상 지속되어서 는 안 된다. 그 희생자의 가족들, 더구나 2 세들이 목숨을 다하기 전에 그 한을 풀 수 있게 되기를 갈망할 뿐이다.* 이길용 기자 부부 * 이길용 기자
  • 10. 그곳에 가다  분단의 상징에서 평화의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다 아픔과 한의 공간에 치유와 희망을 품다 ● 2005년 세계평화축전을 계기로, 남북 대립 의 긴장이 흐르는 분단과 냉전의 상징이던 임진각을 화해와 상생, 평화와 통일의 상징 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조성한 3만평 규모 의 평화누리공원을 조성하였고, 임진각 또 한 새단장을 하여 2009년 새로운 모습으 로 다시 문을 열었다.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 실향민들의 휴식처를 제공하기 위해 건립된 임진각의 무겁고 차가운 분위기는 모던하고 아늑한 분위기의 관광명소로 바뀌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임진각 건물 안 에는 기념품점과 식당, 카페가 있어 임진각 평화누리의 풍경을 감상하며 휴식할 수 있 으며, 옥상에서는 전망대를 통해 민간인통 제구역 마을인 해마루촌 등을 바라볼 수 있 다. 임진각 건물을 나서면, 수천 개의 바람 개비가 통일과 평화의 열망을 품고 매일 새 로운 바람을 맞이하며 서있는 바람의 언덕 을 만날 수 있다. 임진각 평화누리
  • 11. 납 북 과 진 실 10. 11 사진자료제공 _ 임진각 평화누리 (031-956-8300) 이제는 임진각의 상징이 된 바람의 언덕은 탁 트인 넓은 하늘과 푸른 잔디, 그리고 아 름다운 미술작품들로 관광객들에게 휴식 과 여유를 선물한다. 공원 안에 위치한 연 못 위에는 수상카페가 떠 있어 연못 주변의 바람개비들을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도 있 고, 야외공연장에서는 다양한 문화예술 공 연으로 관람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또, 평화랜드에는 다양한 놀이기구를 갖추고 있어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의 가벼운 여 행지로도 사랑받고 있다. 아직도 살아있는 분단의 역사를 곱씹다 ● 평화의 상징으로 변신했다고 해서 임진각 의 역사와 의미 속에 새겨진 과거의 아픈 기억까지 지워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분단 된 한반도의 현실과 역사를 안고 있는 임진 각 평화누리에는 잊지 못할 과거의 기억들 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1953년 전쟁포로 교환을 위해 가설된 자유 의 다리가 이곳 평화누리공원 한 켠에 남아 있다. 당시 경의선 철교까지 차량으로 옮겨 져 온 포로들이 이 다리를 걸어서 넘어 돌 아왔다고 하는데,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유의 다리는 분단의 아픔을 간직한 채 아 직 돌아오지 못한 용사들과 납북된 가족들 의 귀환을 기다리며 서있다. 자유의 다리 아래에는 한반도 모양의 통일연못이 있어 분단된 국토의 통일에 대해 다시 한 번 생 각해보는 시간을 제공한다. 또 이곳에서는 임진각철교가 바라다보여, 도라산역으로 향하는 열차를 바라볼 수 있다. 자유의 다리와 임진각 건물 사이에는 매년 명절이면 흩어진 가족을 생각하며 모여든 사람들이 북녘 땅에 두고 온 부모와 형제, 조상들을 향해 배례를 올리는 망배단이 자 리하고 있어 이산가족들과 망향자들의 애 달픈 가슴을 달래준다. 또, 임진각 평화누리에는 경의선 증기기관 차 전시장이 있다. 이곳에는 한국전쟁 중 폭격을 맞아 멈춰버린 기관차 한 대가 당시 의 그 모습 그대로 자리를 지키며 선채 그 날의 참상을 증명하고 있다. 경의선 장단역 증기기관차는 문화재 78호로 지정되어 전 쟁의 아픔을 모르는 후세에 평화와 통일의 염원과 희망을 전하고 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한민족 공통의 염원에도 어느덧 60여 년의 세월이 덧입혀 져, 이제는 통일비용을 따지며 유불리(有 不利)를 논하는 사람들이 늘어난 시대가 되었다. 임진각 평화누리에 남겨진 역사의 교훈을 다시금 돌아보며 비용계산으로는 따질 수 없는 평화와 생명, 그리고 가족의 의미를 한 번쯤 되새겨 보는 것도 좋겠다. 지구상에 남은 마지막 분단국가인 대한민국. 임진각은 그러한 대한민 국의 현실을 냉엄하게 보여주는 분 단의 상징이자, 냉전시대의 상징과 도 같은 곳이었다. 임진강 너머 북 녘 땅을 바라보며 망향과 이산의 한 을 달래 온 지 어언 60여 년, 이제 이곳은 평화를 염원하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 일반 시민들의 일상 속 쉼터로도 각광받고 있다.
  • 12. 올해로 6 25전쟁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이 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6 25전쟁의 연 대기를 채우기에는 많은 의문부호들이 존 재한다. 특히 민간인 납북사건과 관련하여 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므로 전시납북피 해사건을 규명하는 것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는 국가적 과업이다. 납북정황 파악을 위해 전쟁 중 작성된 기록 을 조사하고 발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전쟁의 포화 속에서 이미 많은 국내 의 기록들이 사라졌다. 그렇기에 손실된 국 내 기록의 공백을 보완하고 납북사건에 대 한 국제적인 공신력, 객관성을 제고하기 위 하여 국외기록의 조사, 발굴이 필요하다. 낡은 문서 한쪽에 적혀 있을지 모르는 납 북 희생자 이름 석 자를 찾아, 그리고 역사 의 뒤안길에서 사라진 희생자들을 추모하 는 기념관 조사를 위해 지난 7월 6일 미국 출장팀은 워싱턴 D.C.행 비행기에 몸을 실 었다. 11박 13일 동안 미 국무부, 국립문서 기록관리청, 국방부 한국전쟁기념관, 육군 역사연구소 박물관을 포함하여 3개 주를 넘나들며 13여개 기관을 방문하는 숨 가쁜 일정이 시작되었다. 200년이라는 비교적 짧은 기간에 여러 민 족이 모여 만들어진 미국이라는 국가에 대 해서 국가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역사와 기록을 충실하게 유지 관리해온 것이라고 한다. 기획 특집  납북자들이 눈물지으며 떠난 이 땅에서 그들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도록 손주희 _ 위원회 사무국 기록수집팀(해외) 조사관 다양한 인종적, 역사적 배경을 가진 민족으 로 구성된 이민자들의 땅이기에 미국인들 은 자신들의 뿌리를 발견하고 인지하는 것 을 중요시한다. 또한 국가경쟁력을 강화하 기 위하여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 중인 그랜 드전략의 중심에는 역사기록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프로젝트가 그 기반으로 자리 잡고 있다. 투명하고 체계적인 역사 보존 방식과 더불어 국민들의 알권리를 보장하 기 위한 정보공개법(Freedom of Information Act), 의무적 정보공개요청제도(Mandatory Declassified Request) 등도 활성화되어 있는 데 이는 미국 국민뿐 아니라 외국인들까지 도 미국정부의 비공개 기록에 대해 공개 요 청을 할 경우 관련 정보 검토를 통해 공개 토록 하는 법안이다. 미국의 역사와 기록에 대한 인식과 정책 은 실제로 인상적이었다. 출장 중 미 국무 부를 방문해 한국과, 정보공개과(FOIA), * 미 국무부
  • 13. 납 북 과 진 실 12. 13 역사과, 국방부 전쟁포로실종국 관계자들 과 면담을 통하여 전시납북사건 진상규명 의 중요성에 대하여 큰 공감대를 형성하고 납북관련 자료수집을 위한 정보공개의 효 율적인 프로세스 협력 등을 이끌어 낼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500여개의 연방정부기관과 50개 주정부에서 작성한 주요 기록 문서들을 보 관하고 있는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에는 약 1억 2천여만 건 이상의 정부 기록 물 등이 보존되어 있다. 이 기록물들은 미 국무부 ‘국’단위 기록관 리 체계인 RG(Record Group)라고 명시되는 500여개의 RG 그룹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전시납북사건 관련 기록은 RG 59(미 국무부 문서군), RG 554(미 극동군사령부, 유엔군 총사령부 문서군), RG 263(CIA 문서군) 등 수십개의 문 서군에 일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전시 중 남한민간인 납북사건은 미 국의 중대 관심사가 아니었으므로 관련기 록을 찾아내는 것은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출장 기간 중 NARA에서 자료수 집을 하며 실제로 방대한 양의 문건을 뒤져 납북정치인들과 관련한 북한방송 녹취록, 북한의 남한 점령시기 동안 시민들의 징집, 북송에 관한 기록 등 일부를 찾아낼 수 있 었다. 납북관련 자료 발굴에는 어려움이 컸 던 반면, 6 25전쟁에 참가한 미군 참전자에 관한 기록은 체계적으로 기록 보존되어 있 었다. 북측의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미군 전쟁포 로가 본국에 보낸 서한, 미군 실종자 가족 들이 미국 정부에 소송하는 개별 소송파일, 미군 포로들의 수기를 묶은 책자 등 방대한 양의 자료가 개개인별로 세밀하게 보존되 고 있었다. 납북 관련 기록도 그와 같이 체 계적으로 보존되면 참 좋았으련만 하는 부 러움과 안타까움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6 25전쟁은 미국에게도 큰 의미를 갖는 전 쟁으로 기억된다. 한국전쟁 정전 6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미 국방부 청사에 설립된 한 국전쟁기념전시관은 그 규모나 전시품 등 이 주변에 있던 타 전쟁기념관보다도 더욱 돋보였다. 연간 25만여 명이 참여하는 미 국방부 투어 에 한국전쟁기념전시관도 포함된다고 하니 전 세계인들에게 6 25전쟁을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미 해병대 박물관의 한국전쟁전시관은 100여 평의 규모로 인천상륙작전, 낙동강 전투, 장진호 전투 등에 사용된 무기, 탱크 등을 완벽하게 재현한 점 등이 흥미로웠다. 11박 13일의 미국 출장을 통해 가장 크게 느꼈던 점은 바로 역사 기록의 중요성에 관 한 것이었다. 기록은 한 나라가 밟아온 흔 적이며 역사 그 자체이다. 우리 위원회에서 하는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러한 역사 기록을 조사하고 발굴하는 일이다. 단 편의 기록들이 모여 지난 60여 년간 과거 속에 묻혀있던 전시납북사건의 진상을 파 악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우리는 60여 년 전에 쓰인, 먼지 쌓 인 문서들을 하나씩 되짚어 본다. 역사 속 으로 사라진 납북자들의 이름 석 자를 찾 아, 그들이 눈물지으며 떠난 이 땅에서 그 들의 이름이 다시 기억되도록 오늘도 구슬 땀을 흘린다. * 미 육군 역사 연구소 역사의 의무는 진실과 허위, 확실과 불확실, 의문과 부인을 분명히 구별하는 것이다. * J.W괴테
  • 14. 기록수집팀의 업무는 국내 및 해외 기록 중 전시 납북과 관련된 기록들을 수집해 납북 피해 및 진상규명의 증거 자료를 확보하기 위한 작업이다. 기록수집팀 합류 후 자료들 을 찾아 주로 국립중앙도서관, 국회도서관, 국가기록원 등 국내 주요 기록전문기관을 대상으로 뛰어다녔다. 수집 후보로 올리고 살펴보는 자료들은 적 지 않지만, 정작 우리 위원회에 필요한 자 료들은 정말 희박하다. 6 25전쟁에 관련 된 자료들 속에서도 민간인들의 납북과 관 련된 내용이 담겨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처음엔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 게 살펴야 하나’ 하는 막막함을 느낄 때가 많았다. 고무튜브 하나 달랑 낀 채로 태평 양 시퍼런 바다 한 가운데에 둥둥 떠 있는 기분이랄까. 두꺼운 책, 파일 속에서 한 줄이라도 ‘납북’ 과 관련된 내용이 등장하길 바라며 한 장 한 장 살폈다. 모래를 흔들고 흔들어 반짝 거리는 사금을 찾는 광부들의 심정이 이렇 지 않을까. 6·25전쟁 “납북 진실규명”은 현재진행형 글 _ 김수연 위원회 사무국 기록수집팀(국내) 조사관 특히 1950년대 기록들은 한 번 훑어보려면 두 배의 수고가 따른다. 낯선 세로쓰기에, 조사를 뺀 거의 모든 단어가 한자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날려 쓴 필기체로. 원본은 대부분 누렇게 변한 갱지 묶음이다. 파일 중간 중간에 먹지에 덧대어 쓴 기름 종이가 끼워져 있기도 하고 볼펜 글씨가 여 기저기 번져있기도 하다. 그렇게 빛바랜 옛 자료들을 꺼내 들추어보며, 그동안 막연히 역사적인 사건으로만 생각했던 6 25전쟁 이 입체적으로 다가옴을 느꼈고, 그럴수록 납북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이 더 가깝게 느 껴졌다. 6 25전쟁은 생각보다 그렇게 멀지 않은 옛 날, 그러니까 내가 함께 지내고 사랑했던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20대 초반에 맞이 하게 된 사건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할아버지는 학업이 중단된 채 입대하여 전 쟁터로 나가셨고, 다행히 목숨은 건지셨지 만 전쟁이 끝난 후에는 꿈을 접은 채 생계 를 잇는 가장이 되셨다. 현장 속에서 만난 사람 
  • 15. 몇 해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그때 전쟁 이 안 났더라면 내 인생은 달라졌을 거다’ 라는 말을 자주 하시곤 했다. 자료 속에는 이러한 할아버지 세대가 살아온 시대의 이 야기가 담겨 있었다. 전쟁 중 작성된 징용 관련 문서를 펼쳐 본 적이 있다. 빼곡하게 적혀있는 1930년대 생 청년들의 이름들. 왠지 가슴이 먹먹해졌 다. 그 시대에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전쟁터에 나서게 된 것이다. 납북되신 분들 도 마찬가지다. 막 시작한 나라를 위해, 그 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땀 흘려 일하고 있었던 평범한 아 버지이자 아들들이었다. 단지 그 시대에 살 고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갑 자기 전쟁을 맞이했고, 가족과의 생이별이 라는 아픔을 겪었고, 심지어는 그 아픔을 품고 한 평생을 살아야 했다. 납 북 과 진 실 14. 15 그에 비해 우리 세대는 단지 이 시대에 태어 났다는 이유만으로 ‘번성한 대한민국’ 속에 서 자유와 안전을 누리고 있다. 앞 세대들 이 아픔 속에서도 땀 흘려 일구어놓은 나라 에서 말이다. 우리가 그때 태어났다면 어땠 을까.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하는 가족이 사 라졌고, 다양한 이유로 오랜 세월 동안 아 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앞 세대들이 참고 견뎌온 것처럼 그렇게 지낼 수 있었을까. 몇 달 전, 국회도서관 지하의 신문 서고에 다녀왔을 때의 일이다. 이젠 누렇게 변색되 어 바스러질 것 같은 50~60년대 옛 신문들 을 조심스레 넘겨보았다. 그 속에는 납치, 행방불명, 학살, 포로, 월 북, 부역, 간첩사건 등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사다난했던 대한민국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소용돌이 한편에서는 전 쟁 중 사라져버린 남편, 아버지, 자식, 부모 를 찾는 납북 피해자 가족들의 울분과 눈물 이 곳곳에 담겨 있었다.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납북’ 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의 미해결 사건이다. ‘해결’에는 여전히 많은 제약들이 존재하지 만 지금이나마 국가가 이 분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작업은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기록들이 더 산화되기 전에 잘 모아 엮어 기억하는 것 역시 이 분 들을 위한 소중한 작업일 것이다. 부족하지 만, 납북 피해자 분들과 그 가족들의 마음 을 담아 맡겨진 업무에 최선을 다하겠노라 다짐해본다.
  • 16. 아름다운 얼굴  납북자 가 족, 6 0년 애달픈 목 소리를 전하 다 이상현 _ 주무관 강원도청 자치정책과 6·25 납북피해담당 납북피해신고서에는 정리되지 않은 문장이 지만 가족들만이 겪을 수 있는 그리움과 애 통함, 그리고 그 시대에 대한 분노 등 절절 한 사연들이 담겨져 있다. 신고서가 하나 둘 늘어갈수록 60여 년 동안 말 못하고 숨 겨둔 사연도 쌓여가는 것 같아, 담당자이기 이전에 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이로 서 많은 생각을 갖게 한다. 2011년 처음 6 25전쟁 납북자 신고접수 업 무를 시작한것 같은데, 어느덧 접수기간 마 지막 해가 되었다. 그동안 강원도 내 납북 자 가족분들께서 신고접수를 많이 해주셨 지만 아직도 납북자 가족들의 한을 풀어드 리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시 군을 거쳐 올라온 서류들을 확인하고 조사하다보면 비록 문서 한 장이지만 그 안 에는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많다. 북한군에 의해 가족들의 생명이 위협당해 피치 못해 끌려가신 아버지, 자신의 실수로 납북되신 아버지 등 가족들은 아직도 그에 대한 죄책감 등에서 힘겨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특히 6 25전쟁 납북자 정의를 보면 ‘남한에 거주하고 있던~’이라는 납북요건에 해당되 는 지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을 때도 있 다. 동족상잔의 비극인 6 25전쟁 이후 정 전 60주년을 맞는 현재, 납북자 가족분들 의 사연을 접하다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이산가족 문제이다. 전쟁세대도 아니고 주위의 친지 중에도 이산가족이 없 기에 평소엔 관심 갖지 않았던 부분이다. 이산가족 현황을 살펴보니 12만여 명이 넘 는 이산가족 등록자들 중 그간 벌써 5만여 분이나 돌아가셨다고 한다. 남으신 분들도 70세 이상의 고령이 많다는 사실은 공식적 인 이산가족 상봉이 없어진 현재, 이분들의 소원인 가족 상봉이 힘들 거라는 생각에 더 안타깝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정부에서 이산가족 상 봉을 추진한다는 소식이 들려 이분들께서 더 늦지 않게 가족을 만나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 생긴 것이다.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들과 가깝지만 아주 먼 곳, 이북에 있는 납북자들이 하루빨리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고 재회하여 그리움 과 눈물에서 행복이 묻어나오는 웃음으로 바뀔 수 있기를 바란다.우리 도의 실무위원 회 위원으로 계신 분께서 전해주신 6 25전 쟁 납북자를 잊지 말자는 물망초 배지가 생 각난다. 10만여 명에 이르는 6 25전쟁 납 북자, 그들에게 가장 큰 소망은 물질적인 무엇보다도 얼굴을 맞대고 60여 년의 그리 움과 애달픔을 토로할 그리운 가족을 만나 보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전시 납북자 가족 여러분의 아픔에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길 바라며, 지금까지도 그랬듯이 마지막까지 6 25전쟁 납북피해 신고접수 업무에 최선 을 다하도록 노력할 생각이다. 납북피해신고서를 접수 받은 후 1차 조사 업무의 많은 부분을 자료검색에 할애한다. 6 25납북인사가족협의회 데이터베이스에 납북자 명단이 있을 때에는 비교적 쉽게 마 무리가 되지만 인우 보증으로 접수된 건은 보증내용만으로 판단하기에는 검토해야 될 부분이 많아 비슷한 시기나 지역 사건들 을 찾아봐야 한다. 보증서의 내용이 자세 하다면 수월하겠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다 보니 보증할만한 지인들도 하나둘 떠나가 고 기억마저 희미해져감에 따라 내용이 미 비하고 허술한 점이 많기 때문이다. 추가로 신고인과 보증인들에게 전화조사를 할 때 는 연로하셔서 통화가 어려우신 분들도 계 시고 더 구체적인 내용을 얻을 수 없을 때 는 혹시나 납북자 인정을 받지 못할까 조바 심을 내시는 가족들을 만날 때면 걱정과 안 타까움이 앞선다. 강원도는 행정구역상 특별한 상황이 있다. 바로 미수복지역이다. 강원도에는 현재 이 북지역으로 완전 미수복지역인 통천, 회양, 평강, 이천, 김화가 있고 일부 미수복지역 으로 철원, 양구, 인제, 고성이 있다. 일부 미수복인 지역에서는 많지는 않으나 꾸준하게 신고접수가 들어오고 있고 이 지 역은 전쟁 당시 이북지역으로, 납북을 입증 할만한 자료를 찾아보기 힘들기에 가장 까 다로운 지역이기도 하다.
  • 17. 납 북 과 진 실 16. 17 지금 만나러 갑니다  독립운동에서 통일운동까지 나라를 위해 살다 간 조부를 기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부주석 김규식 선생의 손녀, 김수진 씨를 만나다 대한민국 역사의 첫장을 연 임시정부의 부 주석, 우사 김규식 선생은 대한제국의 교육 자이자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였고, 또 한 해방 후에는 갈라진 한민족의 통일운동 가이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평화로운 학문 의 길을 버리고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 겠다고 선택한 그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 의 비참한 역사속에서 3.1만세운동이 꽃필 수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파리강화회의 등 외교무대에서 그나마 우리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존경과 감사 의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병자의 몸으로 납북되신 할아버지 김규식 선생의 손녀이신 김수진씨를 만난 것은 감격스런 광복 68주년을 맞은 8.15 광 복절의 바로 다음날이었다. 지난 6월, 한국 전쟁 전시납북자로 공식 인정받았다는 서 류를 보여주는 김수진씨가 5세 남짓이던 무렵 할아버지 김규식 선생이 돌아가셨다. “지금도 어렸던 저를 예뻐해주시던 할아버 지의 모습이 기억나요. 어린 제가 보기에도 할아버지는 많이 왜소한 모습이셨어요.” 김 규식 선생이 자택에서 납치되는 광경을 김 수진씨는 크면서 할머니로부터 들었다고 한 다. “당시에 칠십이 다되신 할아버지는 병 들고 노쇠하신 상태에서 약과 죽을 드시던 상태였는데, 북에서 주요인사들을 한 차로 같이 데려갔다고 해요. 할머니가 그들에게 할아버지는 몸이 병드셔서 못가신다고 말 렸지만 그들이 할아버지를 부축해서 억지 로 데리고 나와 끌고가는 바람에 너무 걱정 이 되어 비서를 함께 보내드렸는데, 그길로 연락이 끊겼다고 들었습니다.” 영면의 순간까지 통일을 염원한 김규식 선생 남아있는 가족들이 김규식 선생의 부음을 접한 것은 어느 일본의 기자가 북한에 갔다 가 찍은 선생의 묘소 사진을 보내주었을 때 였다. 아무런 준비 없이 병자의 몸으로 끌려 간 선생은 약 없이 오래 버틸 수 없었다. 해소, 기침과 열이 나는 상태에서 끌려가는 도중 폭격기가 오면 시궁창에 엎드려 몸을 피하는 나날을 계속해야 했다는 선생은 그 런 중에도 틈만 나면 함께 끌려간 비서의 손 을 잡고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며 통일의 중 요성을 강조했다고 전한다. “6·25전쟁이 발 발한 그 해 9월 납북되어 끌려가던 도중,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12월에 할아버지께서 눈을 감으셨다고 들었어요.” 김규식 선생의 납북 이후 가족들도 어려움 을 겪었다고 증언하는 김수진씨는 “아버지 는 사회활동 제약이 많으셨는지 일본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생활비를 부쳐주셨습니 다.”라며 당시의 납북이란 단어조차 금기시 되던 시대의 어려움을 전했다. 또 이번 전시 납북자로 공식 인정된 것에 대해 “이제야 늦 었지만 바로잡을 것이 바로잡히는구나 싶습 니다. 진작에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 하지만, 지금 이만큼이나마 잘 살게 된 한국 에 감사하고, 모두가 노력해서 잘사는 나라 가 된 게 아니겠어요”라며 회한 어린 소회를 밝혔다. 한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을 꿈꾸 던 김규식선생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 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 18. ● 6·25 납북희생자 기억의 날 행사 6 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6 25전쟁 63주년, 정 전협정 60주년을 맞아 10만여명의 6 25납북자 및 그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한 제4회 “6 25 납북희생자 기 억의 날” 행사를 지난 6월 28일 한국언론진흥재단 국 제회의장에서 개최했다. 이날 행사에는 류길재 통일부 장관, 6 25 전쟁납북진상규명 법률 제정에 기여한 박 선영 前국회의원, 임병철 6 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 회 사무국장 및 전시납북자 가족 500여 명이 참석하 였다. 통일부 장관은 격려사에서 6 25전쟁 납북자가 족이 겪어온 아픔을 위로하고 6 25 전쟁 납북희생자 문제의 해결이 정부의 기본 책무이자 대북 정책의 중 요한 과제임을 설명하였다. 아울러 정부는 납북자의 생사확인과 송환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할 것임을 밝혔다. 끝으로 납북자 가족들은 “아리랑“과 “아름다 운 나라” 고전무용을 보고 “만나야 하리”를 다함께 합 창하며 행사를 마쳤다. 납 북 과 진 실 18. 19 ● 6대 특별시·광역시 6·25 납북피해 사진전 위원회는 6월 17일부터 8월 4일까지 6대 특별시 광역 시 청사 내 로비를 활용하여 「6 25 납북피해 사진전」 을 순회 개최하였다. 이번 전시회에는 납북 사건을 입 증하는 각종 자료 및 납북관련 사진, 언론보도 내용 등 을 통해 국민들이 6 25전쟁 납북자에 대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정리해 놓았다. 또한 「6 25전쟁 납북피해 진상규명 및 납북피해자 명 예회복에 관한 법률」 제정 및 위원회 사무국 개설을 통 해 지난 3년간의 신고접수 현장, 위원회와 가족회의 활 동 및 행사 내용도 담았다. ● 위원회 홈페이지 사이버 추모관 개설 ▲ “대한민국 정부가 6 25전쟁 납북자의 고귀한 희생을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정전 60주년을 맞아 6 25 납북희생자에 대한 추모의 열기와 함께 관심이 더욱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위원 회는 6월 28일 6 25 납북희생자 기억의 날에 맞춰 10 만 명의 6 25전쟁 납북자를 위로하고 추모하기 위한 「사이버 추모관」을 홈페이지(www.abductions625. go.kr) 내에 개설하였다. 사이버 추모관 내에는 헌화 및 분향, 추모 글 남기기, 추모 동영상, 추억의 사진, 납 북자 유품 코너가 만들어졌다. 특히 헌화 및 분향 코너에는 납북자 270명의 사진이 올라가 있어 검색이 가능하며, 현재도 납북자 가족들 로부터 사진을 제공받아 지속적으로 등록을 실시하고 있다. 추모 글은 “아버님 제 나이가 64세가 되었습니 다. 아버님 얼굴조차 몰랐었던 한 살배기였는데 이제 나이가 들어가니 철이 난 것 같습니다. 요즘엔 아버님 을 부르며 이국만리에서 울부짖어 봅니다. 왜 이리 보 고 싶은지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영면하시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고인의 자상함과 인자함을 사진 속에서만 만날 수 있어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명복을 빕니다” 짧은 글에서부터 장문의 글까지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사연들로 가득차고 있다. 위원회 소식 6월 7월 8월
  • 19. ● KBS다큐멘터리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방영 지난 6월 24일 KBS1 TV에서 방영된 가요무대 「6 25 기획」에 이어 7월 27일 정전협정 60주년을 맞아 6 25 납북자 관련 특집 프로그램인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이 방영되었다. 전쟁 당시 가족에게 제대로 인사 한마 디 건네지 못하고 북한에 끌려간 납북자를 그리워하 며 평생을 보낸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담아냈다. 방송에는 납북자 가족인 황용균(75세), 김항태(85세), 이미일(61세), 김성호(83세), 김수진(61세) 씨 등이 출 연해 납북 당시 현장에서 납북된 상황에 대한 증언과 더불어 납북으로 인한 가족의 고통 등을 생생하게 증 언함으로써 같은 아픔을 가진 많은 납북자 가족들에 게 감동을 주었다. 이번 다큐멘터리는 6 25전쟁을 통해 우리사회에 남겨 진 아픔을 보듬는 시간이 되었으며, 국민들의 이해를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다. ● 하반기 6·25 납북피해 광고 영상 제작 방영 ▶ 위원회는 지난 3월 공익광고영상 “딸의 독백”편을 방 영한데 이어 9월부터는 “아버지의 머리”편을 방영한 다. 새로 제작한 영상은 이발소라는 자연스런 공간을 배경으로 머리를 깍으며 나누는 두 노인의 대화를 통 해 스토리가 전개된다. 오래된 친구인 이들은 이발사 가 대화에서 생애 마지막 바램이 납북되신 아버지를 뵙고 머리라도 한번 손질해 드리는 일이라고 하자 또 다른 친구는 금년 말 마감 예정인 납북신고를 서두를 것을 권유한다. 이번에 제작된 공익광고영상은 9월 3일부터 1개월 동 안 주요 케이블TV방송, YTN, KBS^MBC^SBS 드라 마 등 시청자가 많은 채널에 집중 방영할 뿐만 아니라 전국 주요 옥외전광판(33개소)에서도 상영한다. 위원회는 이번 공익광고영상이 6 25납북신고의 필요 성과 중요성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림으로써 납북자 신 고율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위원회는 하계휴가철 6 25 납북피해 홍보를 강화하기 위한 “3대 광역시 현장 홍보”를 실시하였다. 이번 현장 활동은 8월 3일 부산역 남포동 자갈치시장을 시작으 로 8월 10일 대구역 칠성시장 달성공원 동성로, 8월 17일 대전역 중앙시장 은행동사거리 등을 순회하며 진행되었다. 대학생홍보대사들은 각 지역 시민들을 대상으로 현장활동을 펼치면서 무더운 여름을 시원하 게 만들어 줄 6 25전쟁 납북자 신고안내가 인쇄된 손 부채를 나눠주고 카카오스토리나 페이스 북, 트위터를 활용해 신고를 적극 안내하였다. 임병철 사무국장은 “이번 지역순회 현장홍보 활동을 통해 신고접수가 미흡한 지역민들에게 많은 홍보가 되 어 신고접수가 활성화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 하계 휴가철 대학생홍보대사 현장홍보
  • 20. www.abductions625.go.kr 6·25전쟁 납북피해 가슴에 묻은 세월만큼 큰 희망을 얻었어요 ! 납북피해 신고서, 가족관계증명서, 제적등본, 납북경위서 기타 납북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 국내 주소지 관할 시·군·구 방문신고 재외공관 방문신고해외 문의전화 1661-6250 2013년 12월31일 신고종료 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