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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건협 도시 건축 답사 : 남산 - 해방촌

식 민 지 배 의

흔 적 과

해 방 · 분 단 의

산 물

해 방 촌

안창모 「건축과 사회」편집위원, 경기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해 ≪새건축사협의회≫(이하 새건협) 관계자로부터 건축가와 도시 건축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시민들을 위한 근대 건축
답사 프로그램을 기획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근현대 건축사를 전공하는 필자로서는 건축가 그룹이 한국 근현대 건축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기에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몇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부득이 수정 제안을 했
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이루어진 것이 ≪새건협≫ 도시 건축 답사 프로그램이었고, 답사에 대한 일반의 호응이 과히 나
쁘지 않아 올해도 답사를 이어가고 있다. 답사를 자료로 남겨 후일 답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제공하자는 의견이 있
어 글과 이미지로 지난 답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2004년 ≪새건협≫도시 건축 답사의 주제를 키워드로 정리하면
‘한국 전쟁과 도시 그리고 건축’
이었다. 본 주제는 필자가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 왔던 주제의 하나로, 한국 전쟁 발발 50년이 되던 해에 월간 <이상건축>에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전쟁과 건축’
(이상건축 2000년 6월호),
‘한국 전쟁과 도시’
(이상건축 2000년 8월호)를 기획 특집으로 다룬 바 있었다. 따라
서 지난 해 ≪새건협≫주최로 기획된 도시 건축 답사의 주제는 필자가 오랫동안 가져 왔던 관심사를 현장에서 확인해 보는
과정이었다고 하겠다.
누군가 전쟁을 종전이 아닌 발발에 초점을 맞추어 기념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여기서 이 말
의 진위를 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전쟁 발발을 기념하고자 하는 데는 그 의도가 있을 것이고, 이는 전쟁을
기념하는 사회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새로 짜여진 도시 조직 위에 구축되는
건축의 모습 역시 사회의 성격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전쟁’ 논할 때
을
‘도시와 건
축’ 자리는 항상 장외였다. 뒷전 정도도 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의
도시·건축은 적어도 한국 전쟁의 발발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휴전 후 도시와 건축을 복구하는 막중한 역할을 부여받고,
맡은 바 역할을 열심히(?) 수행해 온 도시·건축은 적어도 한국 전쟁의 발발 책임에 대해서는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얼마

282

건축과 사회
나 다행스러운(?) 일인 지 모른다. 그러나 일국을 전쟁의 폐허로부터 복구시키는 일을 담당했던 도시와 건축에 대한 평가
로부터 건축가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시와 건축이 행해 온 역할에 대해서 주목해 보지 않았다. 왜 주목하지 않았는가하는 의문이 들
지 않을 수 없다. 전쟁 발발의 책임이 없기 때문에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도 발언권이 보장되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도
시·건축이 한국 전쟁과 관련된 논의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던 이유를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전후 복구와 조국 근
대화의 과정에서 건축은 도구로서 사용되었지 주체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건축을 만들어 낸 건축인들은 어떠
한 존재일 것인가에 생각이 미치면 새삼스럽게 초라해지는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전쟁’ 화두로 삼아 장광설을 다시 한번 읊조리는 것은 한국 전쟁으로 폐허화된 도시의 실상을 생생하게 재현함으
을
로써 전쟁의 참혹함을 다시 일깨우고, 폐허를 복구하는 데 도시와 건축이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드러내고자 하는 데
있지 않다.

필자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이 땅에서 전개되었던 역사적 사건 중 어느 것보다도 오늘날 한국의 도시와 건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전쟁이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전쟁 이후 남북의 대치 상황은 첨예한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체
제 우위 경쟁으로 이어졌고, 그 영향은 사회 각 분야에 미치고 있는 장기 지속적인 문제인 것이다. 한국 전쟁은 같은 민족
사이에서 발발한 전쟁이었다는 점 이외에도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된 전쟁이자 각각의 이데올로기 수호를 위해 세계
각국이 참여한 전쟁이라는 점에서 여타 국가의 내전과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따라서 한국 전쟁은 남북한 각각에 참혹한 인
적, 물적 피해의 영향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점 외에도 분단 체제를 유지한 채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또는 이데올로기를
빙자한 체제 우위 경쟁을 야기하면서 오늘의 우리 모습을 만들었기 때문에 현재 진행형이다. 또한 양 체제 하의 도시와 건
축의 모습에서 동일 민족, 동일 문화권에서 상이한 이데올로기가 도시와 건축의 모습을 어떻게 다르게 만들었는지를 읽어
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상기와 같은 문제 의식 하에 구성된 7차례에 걸친 도시 건축 답사는 낙산, 세운상가, 장충동, 남산에서 해방촌까지, 용산 등
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금번 첫 번째 연재는
‘남산에서 해방촌’
까지를 다루고자 한다.(필자 註)

서울 시민이면, 아니 한국인이면 서울과
함께 떠올리는 장소가 있다. 남산! 한 때, 초
중고생의 백일장과 사생대회의 단골 장소였
고, 연인들의데이트코스였으며,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 새 신랑과 새 신부가 드라이브 코
스 1순위로 선택하던 곳. 남산은 애국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와 함께 하고 있
었던 곳이다. 이제는 고층 빌딩에 가려 남산
이 안 보이는 곳이 많지만 그나마 남산 타워

남산에서 바라 본 서울

2005 봄

283
덕에거기어디쯤있을것이라는짐작이나해볼뿐이다. 그러나남산은한국근현대사에서우리에게애정어린
추억의 장소만은 아니었다.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남산에게 지난 한 세기는 수난의 시간이기도 했다.
남산에무슨일이있었는지그곳을찾아가본다.

애국가를 숱하게 되뇌면서 우리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남산이 우리 역사에서 그 존재를 새삼스럽게
드러낸 것은 개항으로 인해 조선이 시끌벅적해지면서부터다. 조선 왕조가 한양을 새 도읍지로 조성하면서 남
산은한양도성의안산으로자리매김을하였고, 그래서남산에는남산산신인목멱대왕을봉사(奉祀)하기위하
여목멱신사(木覓神祠)가지어졌다. 목멱신사에는한양을도읍으로정하는데큰공을세운조선의국사였던무
학대사의 초상이 모셔졌기 때문에 일반에는 국사당(國師堂)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목멱신사는 고종 연간까
지매년봄과가을에국가에서치르는초제(醮祭)를극진히받아왔다.
가난했지만자존심이강한선비가많이살았다고해서남산골샌님이라는말까지만들어졌던남산에변화가
시작된것은청일전쟁에서일본이승리하면서부터다. 1893년도성안에외국인의거주가허락된후청일전쟁
에서 승리한 일본은 자국민을 남산의 북사면에 정착시켰고, 일본인 마을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형성된 일본인
마을의 이색적인 경관이 조선인 마을에 비해 번듯했다는 묘사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Isabella Bird

Bishop, 1832~1904)1)의
‘한국과 이웃 나라들’ 잘 나타나 있다. 일본인의 남산 북사면 거주와 함께 1898년
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이 건립되었는데, 1925년 조선신궁이 건립되면서 경성신사로 개칭되었다. 지금 그 자
리에는리라초등학교가위치해있다.

조선신궁 정면

이후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현 숭의여자대학이 위치한 곳에 통감부(1906)가 설치되면서, 일본
의남산점유가가속화되었다. 남산일대에일인을위한공원을만들겠다는목적하에 1908년대한제국정부로

284

건축과 사회
부터현 남산식물원을중심으로남산의북사면과남대문에이르는 30만평에대한사용 허가를받아낸일본은
이듬해공사를시작하여 1910년 5월 29일한양공원을개원하였던것이다. 이렇게조성된한양공원역시 1925
년 조선신궁에 그 터의 일부를 내주게 된다. 합방 직후인 1912년 일본은 조선신궁(朝鮮神宮) 건립 계획을 수립
했고, 신궁은 1920년 남산 성곽이 위치한 능선을 따라 산 중턱에 조성된 대지에 1925년 말 준공되었다. 이 때
남산에 위치했던 국사당은 철거되었다. 철거 이유는 조선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는 국사당의 존재가 눈에 거슬
렸던 것이다. 그래서 국사당은 1925년 인왕산으로(현 위치`:`종로구 무악동 산 2-12)로 이전되었다. 이 밖에도
통감부앞에는동본원사(東本願寺)가그리고현한옥마을이위치했던곳에는헌병대사령부등이자리잡고있
었고, 남산의 동쪽 자락에는 조선 식민지화의 일등 공신인 이등박문을 기리는 박문사(博文寺)도 지어졌다. 이
러했던탓에경복궁에조선총독부가세워진후에도남산은북촌과대비되는일인본거지로서의성격을강하게
유지하고있었다. 해방에이르기까지…

남산의 수난은 한일합방 이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제남대문에서시작하여구성곽길을따라남산을찾아가보자.
남산을 향해 길을 걷다보면 길 오른편으로 600년 도읍지에 걸맞지 않은 새 것 같은 성곽의 일부를 발견하게
된다. 서울성곽은 1900년전차가개설되어성곽안팎이대중교통으로연결되면서성문을통과하는전차길이
놓이면서그존재가부담이되었던것같다. 성벽철거가본격화된것은 1907년일본의대정(大正) 황태자가방
한하기직전
‘성곽처리위원회’
가설치되면서부터다. 이러한사실로인해성곽철거를일제의침략성을드러내
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한 성벽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독립신문에서 종
종다루어지는주제의하나였다. 도시인구의급증과물리적확장이불가피한근대도시의상황은성벽의물리
적경계를의미없게만들었기때문이다.
남대문에서남산으로이어졌던성곽도이러한시대적상황에서철거되었다가지난 1970년대후반에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성곽 길을 따라 걷다가 뜻하지 않게 건너게 되는 다리가 있는데, 이는 퇴계로가 남산 아
래 자락을 깊게 파고 지나가면서 개설되었기 때문이다. 퇴계로는 해방 후 4대문 안에 개설된 유일한 동서를 잇
는간선도로다.
좀 더 오르면 남산 길이 좌우로 갈라지는 곳 우측에 힐튼호텔(김종성 작)이 자리 잡고 있다. 근대 산업 사회
기술미학의정수를보여주는힐튼호텔은해방과전쟁을거치면서급속하게형성되었던윤락가를도심정비차
원에서 재개발하는 과정에 세워졌다. 이제 서울역과 함께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던 사창가를 상징했
던
‘양동’
은까마득한옛말이되어버렸다.

2005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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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성곽이 위치했던 산자락에 언덕처럼 남아 있는 옹벽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잘 정지된 공원(현 아동 광장)을
만나게 된다. 이곳부터 구 조선신궁 터(현 중앙 공원)까지
는 3단으로 남산 산록이 정지되어 있는데, 이는 이승만 정
권 말에 남산에 국회의사당 신축 계획을 추진하면서 새로
정비되었다.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말 많던 남
산국회의사당신축계획(당선안김수근)을취소하고남산
공원화 계획을 세움에 따라 이 곳 역시 공원으로 조성되었

남산 해방촌 아동 공원에서 본
서울 시가지

다. 지금은어린이놀이시설몇개만남아있고, 공원의벤
치는 시간의 여유가 있는 어르신들과 갈 곳 없는 홈 리스

(homeless)들의 차지가 되고 있다. 계단을 오른 후 왼편
의 시가지 쪽을 따라 시가 전경을 조망하면서 걷다 보면 공
원 한편에 위치한 말을 탄 장군 동상을 발견하게 된다. 김
유신 장군 동상이다.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한가로
운 공원에 웬 느닷없는 김유신 장군 동상일까?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 우리는 1960년대 사회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남산에 조선신궁이 있었다는 사실

국회의사당 당선안(김수근 작)

외에도 5.16으로 집권한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 전 대통
령의 전력도 남산을 멍들게 한 요인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힘으로 집권한 제3공화국은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조국
근대화’ 찾았으며, 이 과정에서 부정적 전통의 제거와
에서
새로운 전통의 확립을 내세웠고, 이러한 정책의 결과는
‘문민’
중심의 유교적 전통을
‘무인’
중심의 구국적 전통
으로 치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66년 8월 15일에 발족
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 그 역할을 맡았다.
가
‘우리
민족 사상 불멸의 공적을 남긴 위인 및 열사들의 조상을 건
립함으로써그정신을길이선양케하여민족의귀감’
을삼
고자 했던 조상건립위원회는 1차로 10명2)을 선정했는데,
김유신은 그 중 하나였다. 김유신 장군 동상은 당초 태평
로 2가 녹지대에 건립3)되었으나 언젠가 지금의 위치로 옮
겨진 것이다. 김유신 장군 동상 외에도 조상건립위원회는

286

건축과 사회

김유신 장군 동상
70년대 초까지 서울은 물론 전국에 걸쳐 호국 선열과 민족의 자긍심을 높인 위인들의 동상을 집중적으로 건립
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가속화시킨 것이 1.21사태다. 1968년 1월 21일 발생한 1.21사태에 기민하게 대응한
사람은 개발 연대에 불도저 시장으로 불렸던 김현옥 서울 시장이었다. 김현옥 시장은 동년 3월 4일
‘남산 요새
화계획’
을발표했는데, 그핵심은유사시서울시민 3~40만명이대피할수있는지하수용시설로계획된
‘남
산 1호터널’‘2호터널’
과
이었다. 오늘날서울을남북으로연결하는중추적인교통망을형성하고있는터널이
교통문제가아닌전혀다른사회적분위기하에서정치적이고국가안보차원에서건설되었던것이다. 이로서
남산은깊은곳까지사람의손을타야했다.

발걸음을 다시 남산으로 옮겨 두 번째 계단을 오르면 백범 광장에 이르게 된다. 이 곳에는 조국의 광복을 위
해일생을바친백범김구선생의동상4)이있어선생을기념하기위해백범광장이라불린다. 백범광장의서남
쪽에는 야외 음악당(안병의 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건물은 남산 공원화 계획의 일환으로 조개껍질 모양의
콘크리트구조물로서 1만5천명을수용할수있는규모로 1962년에건축되었으나지금은철거되고없다. 이제
그자리에는성재이시영선생동상5)이있고어르신들이휴식을즐길수있는녹지가마련되어있다.

이제 마지막 계단을 오를 차례다. 그런데 그 계단은 앞
서 힘들게 올라왔던 계단과는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계
단수도더많을뿐아니라직선으로남산을향해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계단 왼편의 경사면에는 우뚝 선 고
층 건물이 하나 솟아 있다.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계단은왜그리번듯할까?
답은 이 계단이 관폐대사(官弊大社) 조선신궁으로 오르
는계단이었기때문이다. 서울을조망하는위치인남산중
턱에 자리 잡았던 신궁은 조선의 정신 세계까지를 지배하
고자 했던 일본의 의지를 보여 준다. 현존하는 계단은 신
궁으로 이르는 주 계단의 일부였다. 일제 강점기 말 내선
일체가 강조되던 시절 수많은 한인들이 참배를 강요당했
고, 학생들도그계단을따라신사참배를해야만했고더러
는 참배 기념 사진을 찍던 곳이다. 그 계단 옆에 어린이 회
관(이광노작)6)이 1970년지어졌다. 경제적으로곤궁했던
시절 우리 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어린이를 위해 기꺼이 마

조선신궁(항공사진)

2005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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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했던 회관은 접근이 어렵고 어린이에게 위
험할 뿐 아니라 확장이 어려운 대지 조건으로
인해 5년 만에 광진구 능동에 위치한 어린이
대공원 옆으로 이전하고 지금은 서울시 교육
과학연구원으로사용되고있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반듯하게 정
리된 정원이 눈에 펼쳐진다. 조선신궁이 위치
했던 곳(현 중앙 광장)이다. 해방 후에 일제의
잔재를 깨끗이 정리하지 못했던 우리였지만
조선신궁 본전이 자리했던 현재의 중앙 광장

다행히 조선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는 상징이

었던 조선신궁은 이 땅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그 신궁을 없앤 것은 우리들이 아니었다. 해방이 되자 일인들은
이튿날 오후에 승신식(昇神式)이라는 폐쇄 행사를 갖고 동년 9월 7일 해체를 시작하여 10월 6일 작업을 마무리
한 후 나머지를 소각한 후 철수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해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
의상징을지울수있는기회를가질수없었다.
해방과함께남산에서조선신궁이철거되었지만, 남산이우리
시민의 품에 돌아오기까지는 많은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신궁
이 있던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윤효중
작)이었다. 동상은 1956년 8월 15일 81세였던 대통령의 나이에
맞춰 81척 높이로 세워졌다. 그러나 4.19혁명으로 동상은 학생
들에 의해 부서지는 수난을 당했고 우남정7)으로 불리던 팔각정
의 이름도 지워졌다. 자신의 동상을 발아래 민의를 대변하는 국
회의사당을건립하려했던이승만의노욕이부른결과였다.
이곳이조선신궁이었다는사실을의식하고지어진건물이구
어린이 회관을 마주하고 서 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그것이
다. 식민 지배의 원흉이었던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 의사 기

이승만 동상

념관8)을 조선신궁 터의 한을 풀고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대안으
로 판단했던 것 같다. 기념관은 전통 건축 양식을 콘크리트로 번안해서 지어졌는데 이 같은 건물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선호했기 때문에 콘크리트로 번안된 전통 건축은
‘박정희 양식’ 불리기도 했다. 1974년에는 현
으로
재의동상도세워졌다.
구어린이회관과안중근의사기념관을뒤로하고한여름시원한물줄기를자랑했을분수를돌아서앞으로
나가면이제는초라해진식물원이자리잡고있는곳이신궁의본전이위치했던곳이다.

288

건축과 사회
해방촌 전경

식물원을 뒤로 하고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남산 순환도로에 들어서서 남쪽을 따라 걷다 전망 좋을 것 같은 곳
에위치한독일문화원을지나열려있는주차장9)으로들어서면이전과는다른색다른풍경이펼쳐진다.
남산의겉과속이전쟁과국가안위그리고경제개발로멍들어갈때남산의북사면에는 6.25전쟁으로갈곳
을 잃은 피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른바 해방촌의 시작이다. 피난민에 의해 남서측 산록에 자리 잡은
해방촌은 경제 개발기에
‘무작정 상경’ 대표되는 이촌향도민들에 의해 그 입지가 공고히 되었다. 해방촌
으로
이 인기가 있었던 것은 도심과 서울역이 도보권인 해방촌의 입지 덕분이다. 날품팔이라도 하면서 삶을 이어가
려는이들에게는서울역과도심이가까운따뜻한남산의산록은최적의주거지였던것이다.
해방촌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소설가 강신재는 1957년에 <해방촌 가는길>을 발표했고, 나이
지긋한 분에게는 아스라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예전 해방촌
의 때깔을 많이 벗은 지금, 해방촌은 그 현장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에 의해 이러 저러한 기록으로 곳곳에 남아
있다.
이제 해방촌도 과거의 모습을 많이 벗어나고 있다. 주거 환경 개선 사업으로 많은 다세대 주택들이 입지해
있고 몇 채 남지 않은 슬럼의 흔적은 빠르게 그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해방촌에는 아직도 전후 복구기
의 의지를 담았던
‘신흥(新興)’
이라는 말이 곳곳에 남아 있다. 새롭게 흥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하는
‘신흥상회’
‘신흥여관’
등은 70년대를살아온이들에게는매우익숙한단어들이다. 해방촌에는그러한이름의흔적이
‘신
흥길’
로남아있어해방촌에둥지를틀었던이들이미구에꿈꾸었던흥한사회의여망을증거하고있다.

2005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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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에 주둔한 미군이 자리를 내어 줌
에 따라 100여 년 만에 우리 품으로 돌아
오는 용산을 어찌할 것인가가 국민적 관
심이 되고 있다. 이제 해방촌도 그 운명
을달리해야하는시점에처할지도모른
다. 북악에서 종묘를 거쳐 남산에 이르
는 녹지축을 한강까지 잇고자 하는 바람
이많은공감대를형성해가고있기때문
이다. 해방촌이 그 길목을 지키고 있기
해방촌 전경

에눈앞에펼쳐진이풍경도우리시야에
서사라지고, 어느때인가기억에서마저
지워질지도 모른다.‘남산 제 모습 찾기
운동’ 전개되면서 폭파 공법으로 화려
이
하게 사라졌던 남산 외인아파트처럼 해
방촌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날려 보내야
할곳일까?
해방촌의 마지막 흔적, 호국신사 터

해방촌은 오늘의 우리 삶을 일궈낸 현
장이있었던곳이다.

註
1) 영국 왕립지리학회 소속 지리학자로 1894년부터 1897년 사이에 4차례 조선을 방문한 후, 저서 <한국과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를 남겼다.
2) 10인의 위인``:``이순신, 세종대왕, 을지문덕, 사명대사, 김유신, 강감찬, 계백, 광개토대왕, 김춘추, 윤관
3) 1969년 9월 23일 건립
4) 1969년 8월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회 건립
5) 1969년 9월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건립위원회 건립
6) 현재 교육과학연구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7) 우남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호
8) 1970년 10월 26일 개관
‘빛깔 있는 책’ 유명한 출판사 대원사의 주차장이다.
으로
9)
본 글의 후반부는 <문화와 나> 2004년 겨울호
‘근현대 건축 순례-남산편’ 게재된 글입니다.
에

290

건축과 사회
10

12

9

11

7

6

5

4

3

8
2
1

답사 경로
「건축과 사회」
2005 봄 / 새건축 도시 건축 답사`:`남산`-`해방촌

식민지배의 흔적과 해방·분단의 산물 해방촌
-` 안창모 경기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교수

답사 시작점, 성곽이 위치했던 힐튼호텔 건너편 축대 위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신궁 터로 정지되었다.

백범 광장의 백범 김구 동

구 어린이 회관과 구 조선

아동 공원 오르는 길, 이 곳은 성밖이다.

구 어린이 회관에서 바라

아동 공원에서 바라 본 서울 전경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동

김유신 장군 동상, 애국선열 조상위원회에 의해 건립된
유신시대 무인 동상

구 조선신궁 터, 조선신궁
식물원이 위치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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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김구 동상

구 조선신궁 본전 터에서 바라 본 신궁 터

해방촌 신흥시장, 거리에서는 보이지 않는 숨은 시장이다.

과 구 조선신궁 계단

독일 문화원

해방촌 신흥시장 내부 전경

에서 바라 본 서울 전경

해방촌 전경, 대원사 주차장, 해방촌(근경)과 용산(원경) 전경,
왼편의 뾰족한 교회탑이 해방촌과 역사를 함께 한 해방교회다.

해방촌의 마지막 흔적들(구 호국신사 터)

해방촌 가는 길

구 호국신사 계단

념관과 동상, 콘크리트로 재현된 한옥 기념관

조선신궁 본전이 놓였던 곳에는 현재
있다.

해방촌의 중심, 해방촌 오거리

해방촌 신흥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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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건협 도시 건축_답사]_남산-해방촌__식민지배의_흔적과_해방ㆍ분단의_산물_해방촌

  • 1. 새건협 도시 건축 답사 : 남산 - 해방촌 식 민 지 배 의 흔 적 과 해 방 · 분 단 의 산 물 해 방 촌 안창모 「건축과 사회」편집위원, 경기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교수 지난 해 ≪새건축사협의회≫(이하 새건협) 관계자로부터 건축가와 도시 건축에 관심을 갖고 있는 시민들을 위한 근대 건축 답사 프로그램을 기획해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근현대 건축사를 전공하는 필자로서는 건축가 그룹이 한국 근현대 건축에 관심을 갖고 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기에 반가운 제안이었지만 몇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부득이 수정 제안을 했 다. 그 제안이 받아들여져 이루어진 것이 ≪새건협≫ 도시 건축 답사 프로그램이었고, 답사에 대한 일반의 호응이 과히 나 쁘지 않아 올해도 답사를 이어가고 있다. 답사를 자료로 남겨 후일 답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도 제공하자는 의견이 있 어 글과 이미지로 지난 답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2004년 ≪새건협≫도시 건축 답사의 주제를 키워드로 정리하면 ‘한국 전쟁과 도시 그리고 건축’ 이었다. 본 주제는 필자가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져 왔던 주제의 하나로, 한국 전쟁 발발 50년이 되던 해에 월간 <이상건축>에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전쟁과 건축’ (이상건축 2000년 6월호), ‘한국 전쟁과 도시’ (이상건축 2000년 8월호)를 기획 특집으로 다룬 바 있었다. 따라 서 지난 해 ≪새건협≫주최로 기획된 도시 건축 답사의 주제는 필자가 오랫동안 가져 왔던 관심사를 현장에서 확인해 보는 과정이었다고 하겠다. 누군가 전쟁을 종전이 아닌 발발에 초점을 맞추어 기념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여기서 이 말 의 진위를 논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전쟁 발발을 기념하고자 하는 데는 그 의도가 있을 것이고, 이는 전쟁을 기념하는 사회의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새로 짜여진 도시 조직 위에 구축되는 건축의 모습 역시 사회의 성격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전쟁’ 논할 때 을 ‘도시와 건 축’ 자리는 항상 장외였다. 뒷전 정도도 못되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의 도시·건축은 적어도 한국 전쟁의 발발에 대해서는 책임이 없다. 휴전 후 도시와 건축을 복구하는 막중한 역할을 부여받고, 맡은 바 역할을 열심히(?) 수행해 온 도시·건축은 적어도 한국 전쟁의 발발 책임에 대해서는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얼마 282 건축과 사회
  • 2. 나 다행스러운(?) 일인 지 모른다. 그러나 일국을 전쟁의 폐허로부터 복구시키는 일을 담당했던 도시와 건축에 대한 평가 로부터 건축가가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면 문제는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도시와 건축이 행해 온 역할에 대해서 주목해 보지 않았다. 왜 주목하지 않았는가하는 의문이 들 지 않을 수 없다. 전쟁 발발의 책임이 없기 때문에 그로 인한 결과에 대해서도 발언권이 보장되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도 시·건축이 한국 전쟁과 관련된 논의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던 이유를 쉽게 짐작해 볼 수 있다. 전후 복구와 조국 근 대화의 과정에서 건축은 도구로서 사용되었지 주체가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건축을 만들어 낸 건축인들은 어떠 한 존재일 것인가에 생각이 미치면 새삼스럽게 초라해지는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전쟁’ 화두로 삼아 장광설을 다시 한번 읊조리는 것은 한국 전쟁으로 폐허화된 도시의 실상을 생생하게 재현함으 을 로써 전쟁의 참혹함을 다시 일깨우고, 폐허를 복구하는 데 도시와 건축이 얼마나 많은 기여를 했는지 드러내고자 하는 데 있지 않다. 필자는 지난 한 세기 동안 이 땅에서 전개되었던 역사적 사건 중 어느 것보다도 오늘날 한국의 도시와 건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전쟁이 핵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 전쟁 이후 남북의 대치 상황은 첨예한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체 제 우위 경쟁으로 이어졌고, 그 영향은 사회 각 분야에 미치고 있는 장기 지속적인 문제인 것이다. 한국 전쟁은 같은 민족 사이에서 발발한 전쟁이었다는 점 이외에도 이데올로기가 첨예하게 대립된 전쟁이자 각각의 이데올로기 수호를 위해 세계 각국이 참여한 전쟁이라는 점에서 여타 국가의 내전과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따라서 한국 전쟁은 남북한 각각에 참혹한 인 적, 물적 피해의 영향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점 외에도 분단 체제를 유지한 채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또는 이데올로기를 빙자한 체제 우위 경쟁을 야기하면서 오늘의 우리 모습을 만들었기 때문에 현재 진행형이다. 또한 양 체제 하의 도시와 건 축의 모습에서 동일 민족, 동일 문화권에서 상이한 이데올로기가 도시와 건축의 모습을 어떻게 다르게 만들었는지를 읽어 낼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 준다. 상기와 같은 문제 의식 하에 구성된 7차례에 걸친 도시 건축 답사는 낙산, 세운상가, 장충동, 남산에서 해방촌까지, 용산 등 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으며, 금번 첫 번째 연재는 ‘남산에서 해방촌’ 까지를 다루고자 한다.(필자 註) 서울 시민이면, 아니 한국인이면 서울과 함께 떠올리는 장소가 있다. 남산! 한 때, 초 중고생의 백일장과 사생대회의 단골 장소였 고, 연인들의데이트코스였으며,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 새 신랑과 새 신부가 드라이브 코 스 1순위로 선택하던 곳. 남산은 애국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와 함께 하고 있 었던 곳이다. 이제는 고층 빌딩에 가려 남산 이 안 보이는 곳이 많지만 그나마 남산 타워 남산에서 바라 본 서울 2005 봄 283
  • 3. 덕에거기어디쯤있을것이라는짐작이나해볼뿐이다. 그러나남산은한국근현대사에서우리에게애정어린 추억의 장소만은 아니었다.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남산에게 지난 한 세기는 수난의 시간이기도 했다. 남산에무슨일이있었는지그곳을찾아가본다. 애국가를 숱하게 되뇌면서 우리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남산이 우리 역사에서 그 존재를 새삼스럽게 드러낸 것은 개항으로 인해 조선이 시끌벅적해지면서부터다. 조선 왕조가 한양을 새 도읍지로 조성하면서 남 산은한양도성의안산으로자리매김을하였고, 그래서남산에는남산산신인목멱대왕을봉사(奉祀)하기위하 여목멱신사(木覓神祠)가지어졌다. 목멱신사에는한양을도읍으로정하는데큰공을세운조선의국사였던무 학대사의 초상이 모셔졌기 때문에 일반에는 국사당(國師堂)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목멱신사는 고종 연간까 지매년봄과가을에국가에서치르는초제(醮祭)를극진히받아왔다. 가난했지만자존심이강한선비가많이살았다고해서남산골샌님이라는말까지만들어졌던남산에변화가 시작된것은청일전쟁에서일본이승리하면서부터다. 1893년도성안에외국인의거주가허락된후청일전쟁 에서 승리한 일본은 자국민을 남산의 북사면에 정착시켰고, 일본인 마을이 만들어졌다. 그렇게 형성된 일본인 마을의 이색적인 경관이 조선인 마을에 비해 번듯했다는 묘사는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Isabella Bird Bishop, 1832~1904)1)의 ‘한국과 이웃 나라들’ 잘 나타나 있다. 일본인의 남산 북사면 거주와 함께 1898년 에 남산대신궁(南山大神宮)이 건립되었는데, 1925년 조선신궁이 건립되면서 경성신사로 개칭되었다. 지금 그 자 리에는리라초등학교가위치해있다. 조선신궁 정면 이후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고, 현 숭의여자대학이 위치한 곳에 통감부(1906)가 설치되면서, 일본 의남산점유가가속화되었다. 남산일대에일인을위한공원을만들겠다는목적하에 1908년대한제국정부로 284 건축과 사회
  • 4. 부터현 남산식물원을중심으로남산의북사면과남대문에이르는 30만평에대한사용 허가를받아낸일본은 이듬해공사를시작하여 1910년 5월 29일한양공원을개원하였던것이다. 이렇게조성된한양공원역시 1925 년 조선신궁에 그 터의 일부를 내주게 된다. 합방 직후인 1912년 일본은 조선신궁(朝鮮神宮) 건립 계획을 수립 했고, 신궁은 1920년 남산 성곽이 위치한 능선을 따라 산 중턱에 조성된 대지에 1925년 말 준공되었다. 이 때 남산에 위치했던 국사당은 철거되었다. 철거 이유는 조선신궁보다 높은 곳에 있는 국사당의 존재가 눈에 거슬 렸던 것이다. 그래서 국사당은 1925년 인왕산으로(현 위치`:`종로구 무악동 산 2-12)로 이전되었다. 이 밖에도 통감부앞에는동본원사(東本願寺)가그리고현한옥마을이위치했던곳에는헌병대사령부등이자리잡고있 었고, 남산의 동쪽 자락에는 조선 식민지화의 일등 공신인 이등박문을 기리는 박문사(博文寺)도 지어졌다. 이 러했던탓에경복궁에조선총독부가세워진후에도남산은북촌과대비되는일인본거지로서의성격을강하게 유지하고있었다. 해방에이르기까지… 남산의 수난은 한일합방 이전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제남대문에서시작하여구성곽길을따라남산을찾아가보자. 남산을 향해 길을 걷다보면 길 오른편으로 600년 도읍지에 걸맞지 않은 새 것 같은 성곽의 일부를 발견하게 된다. 서울성곽은 1900년전차가개설되어성곽안팎이대중교통으로연결되면서성문을통과하는전차길이 놓이면서그존재가부담이되었던것같다. 성벽철거가본격화된것은 1907년일본의대정(大正) 황태자가방 한하기직전 ‘성곽처리위원회’ 가설치되면서부터다. 이러한사실로인해성곽철거를일제의침략성을드러내 는 대표적인 사례로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이미 그 기능을 상실한 성벽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독립신문에서 종 종다루어지는주제의하나였다. 도시인구의급증과물리적확장이불가피한근대도시의상황은성벽의물리 적경계를의미없게만들었기때문이다. 남대문에서남산으로이어졌던성곽도이러한시대적상황에서철거되었다가지난 1970년대후반에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성곽 길을 따라 걷다가 뜻하지 않게 건너게 되는 다리가 있는데, 이는 퇴계로가 남산 아 래 자락을 깊게 파고 지나가면서 개설되었기 때문이다. 퇴계로는 해방 후 4대문 안에 개설된 유일한 동서를 잇 는간선도로다. 좀 더 오르면 남산 길이 좌우로 갈라지는 곳 우측에 힐튼호텔(김종성 작)이 자리 잡고 있다. 근대 산업 사회 기술미학의정수를보여주는힐튼호텔은해방과전쟁을거치면서급속하게형성되었던윤락가를도심정비차 원에서 재개발하는 과정에 세워졌다. 이제 서울역과 함께 사람들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었던 사창가를 상징했 던 ‘양동’ 은까마득한옛말이되어버렸다. 2005 봄 285
  • 5. 옛 성곽이 위치했던 산자락에 언덕처럼 남아 있는 옹벽 옆으로 난 계단을 오르면 잘 정지된 공원(현 아동 광장)을 만나게 된다. 이곳부터 구 조선신궁 터(현 중앙 공원)까지 는 3단으로 남산 산록이 정지되어 있는데, 이는 이승만 정 권 말에 남산에 국회의사당 신축 계획을 추진하면서 새로 정비되었다. 5.16 이후 국가재건최고회의에서 말 많던 남 산국회의사당신축계획(당선안김수근)을취소하고남산 공원화 계획을 세움에 따라 이 곳 역시 공원으로 조성되었 남산 해방촌 아동 공원에서 본 서울 시가지 다. 지금은어린이놀이시설몇개만남아있고, 공원의벤 치는 시간의 여유가 있는 어르신들과 갈 곳 없는 홈 리스 (homeless)들의 차지가 되고 있다. 계단을 오른 후 왼편 의 시가지 쪽을 따라 시가 전경을 조망하면서 걷다 보면 공 원 한편에 위치한 말을 탄 장군 동상을 발견하게 된다. 김 유신 장군 동상이다.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한가로 운 공원에 웬 느닷없는 김유신 장군 동상일까? 그 의문을 풀기 위해서 우리는 1960년대 사회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남산에 조선신궁이 있었다는 사실 국회의사당 당선안(김수근 작) 외에도 5.16으로 집권한 일본군 장교 출신 박정희 전 대통 령의 전력도 남산을 멍들게 한 요인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힘으로 집권한 제3공화국은 정권의 정당성 확보를 ‘조국 근대화’ 찾았으며, 이 과정에서 부정적 전통의 제거와 에서 새로운 전통의 확립을 내세웠고, 이러한 정책의 결과는 ‘문민’ 중심의 유교적 전통을 ‘무인’ 중심의 구국적 전통 으로 치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966년 8월 15일에 발족 한 ‘애국선열조상건립위원회’ 그 역할을 맡았다. 가 ‘우리 민족 사상 불멸의 공적을 남긴 위인 및 열사들의 조상을 건 립함으로써그정신을길이선양케하여민족의귀감’ 을삼 고자 했던 조상건립위원회는 1차로 10명2)을 선정했는데, 김유신은 그 중 하나였다. 김유신 장군 동상은 당초 태평 로 2가 녹지대에 건립3)되었으나 언젠가 지금의 위치로 옮 겨진 것이다. 김유신 장군 동상 외에도 조상건립위원회는 286 건축과 사회 김유신 장군 동상
  • 6. 70년대 초까지 서울은 물론 전국에 걸쳐 호국 선열과 민족의 자긍심을 높인 위인들의 동상을 집중적으로 건립 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가속화시킨 것이 1.21사태다. 1968년 1월 21일 발생한 1.21사태에 기민하게 대응한 사람은 개발 연대에 불도저 시장으로 불렸던 김현옥 서울 시장이었다. 김현옥 시장은 동년 3월 4일 ‘남산 요새 화계획’ 을발표했는데, 그핵심은유사시서울시민 3~40만명이대피할수있는지하수용시설로계획된 ‘남 산 1호터널’‘2호터널’ 과 이었다. 오늘날서울을남북으로연결하는중추적인교통망을형성하고있는터널이 교통문제가아닌전혀다른사회적분위기하에서정치적이고국가안보차원에서건설되었던것이다. 이로서 남산은깊은곳까지사람의손을타야했다. 발걸음을 다시 남산으로 옮겨 두 번째 계단을 오르면 백범 광장에 이르게 된다. 이 곳에는 조국의 광복을 위 해일생을바친백범김구선생의동상4)이있어선생을기념하기위해백범광장이라불린다. 백범광장의서남 쪽에는 야외 음악당(안병의 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건물은 남산 공원화 계획의 일환으로 조개껍질 모양의 콘크리트구조물로서 1만5천명을수용할수있는규모로 1962년에건축되었으나지금은철거되고없다. 이제 그자리에는성재이시영선생동상5)이있고어르신들이휴식을즐길수있는녹지가마련되어있다. 이제 마지막 계단을 오를 차례다. 그런데 그 계단은 앞 서 힘들게 올라왔던 계단과는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계 단수도더많을뿐아니라직선으로남산을향해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계단 왼편의 경사면에는 우뚝 선 고 층 건물이 하나 솟아 있다.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마지막계단은왜그리번듯할까? 답은 이 계단이 관폐대사(官弊大社) 조선신궁으로 오르 는계단이었기때문이다. 서울을조망하는위치인남산중 턱에 자리 잡았던 신궁은 조선의 정신 세계까지를 지배하 고자 했던 일본의 의지를 보여 준다. 현존하는 계단은 신 궁으로 이르는 주 계단의 일부였다. 일제 강점기 말 내선 일체가 강조되던 시절 수많은 한인들이 참배를 강요당했 고, 학생들도그계단을따라신사참배를해야만했고더러 는 참배 기념 사진을 찍던 곳이다. 그 계단 옆에 어린이 회 관(이광노작)6)이 1970년지어졌다. 경제적으로곤궁했던 시절 우리 사회의 미래를 책임질 어린이를 위해 기꺼이 마 조선신궁(항공사진) 2005 봄 287
  • 7. 련했던 회관은 접근이 어렵고 어린이에게 위 험할 뿐 아니라 확장이 어려운 대지 조건으로 인해 5년 만에 광진구 능동에 위치한 어린이 대공원 옆으로 이전하고 지금은 서울시 교육 과학연구원으로사용되고있다. 마지막 계단을 오르면 정면에 반듯하게 정 리된 정원이 눈에 펼쳐진다. 조선신궁이 위치 했던 곳(현 중앙 광장)이다. 해방 후에 일제의 잔재를 깨끗이 정리하지 못했던 우리였지만 조선신궁 본전이 자리했던 현재의 중앙 광장 다행히 조선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는 상징이 었던 조선신궁은 이 땅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그 신궁을 없앤 것은 우리들이 아니었다. 해방이 되자 일인들은 이튿날 오후에 승신식(昇神式)이라는 폐쇄 행사를 갖고 동년 9월 7일 해체를 시작하여 10월 6일 작업을 마무리 한 후 나머지를 소각한 후 철수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해방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본 제국주의 의상징을지울수있는기회를가질수없었다. 해방과함께남산에서조선신궁이철거되었지만, 남산이우리 시민의 품에 돌아오기까지는 많은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신궁 이 있던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이승만 전 대통령 동상(윤효중 작)이었다. 동상은 1956년 8월 15일 81세였던 대통령의 나이에 맞춰 81척 높이로 세워졌다. 그러나 4.19혁명으로 동상은 학생 들에 의해 부서지는 수난을 당했고 우남정7)으로 불리던 팔각정 의 이름도 지워졌다. 자신의 동상을 발아래 민의를 대변하는 국 회의사당을건립하려했던이승만의노욕이부른결과였다. 이곳이조선신궁이었다는사실을의식하고지어진건물이구 어린이 회관을 마주하고 서 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그것이 다. 식민 지배의 원흉이었던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 의사 기 이승만 동상 념관8)을 조선신궁 터의 한을 풀고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대안으 로 판단했던 것 같다. 기념관은 전통 건축 양식을 콘크리트로 번안해서 지어졌는데 이 같은 건물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선호했기 때문에 콘크리트로 번안된 전통 건축은 ‘박정희 양식’ 불리기도 했다. 1974년에는 현 으로 재의동상도세워졌다. 구어린이회관과안중근의사기념관을뒤로하고한여름시원한물줄기를자랑했을분수를돌아서앞으로 나가면이제는초라해진식물원이자리잡고있는곳이신궁의본전이위치했던곳이다. 288 건축과 사회
  • 8. 해방촌 전경 식물원을 뒤로 하고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남산 순환도로에 들어서서 남쪽을 따라 걷다 전망 좋을 것 같은 곳 에위치한독일문화원을지나열려있는주차장9)으로들어서면이전과는다른색다른풍경이펼쳐진다. 남산의겉과속이전쟁과국가안위그리고경제개발로멍들어갈때남산의북사면에는 6.25전쟁으로갈곳 을 잃은 피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이른바 해방촌의 시작이다. 피난민에 의해 남서측 산록에 자리 잡은 해방촌은 경제 개발기에 ‘무작정 상경’ 대표되는 이촌향도민들에 의해 그 입지가 공고히 되었다. 해방촌 으로 이 인기가 있었던 것은 도심과 서울역이 도보권인 해방촌의 입지 덕분이다. 날품팔이라도 하면서 삶을 이어가 려는이들에게는서울역과도심이가까운따뜻한남산의산록은최적의주거지였던것이다. 해방촌에 대해서는 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소설가 강신재는 1957년에 <해방촌 가는길>을 발표했고, 나이 지긋한 분에게는 아스라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의 무대가 되기도 했다. 예전 해방촌 의 때깔을 많이 벗은 지금, 해방촌은 그 현장을 기억하는 많은 이들에 의해 이러 저러한 기록으로 곳곳에 남아 있다. 이제 해방촌도 과거의 모습을 많이 벗어나고 있다. 주거 환경 개선 사업으로 많은 다세대 주택들이 입지해 있고 몇 채 남지 않은 슬럼의 흔적은 빠르게 그 모습이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해방촌에는 아직도 전후 복구기 의 의지를 담았던 ‘신흥(新興)’ 이라는 말이 곳곳에 남아 있다. 새롭게 흥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하는 ‘신흥상회’ ‘신흥여관’ 등은 70년대를살아온이들에게는매우익숙한단어들이다. 해방촌에는그러한이름의흔적이 ‘신 흥길’ 로남아있어해방촌에둥지를틀었던이들이미구에꿈꾸었던흥한사회의여망을증거하고있다. 2005 봄 289
  • 9. 용산에 주둔한 미군이 자리를 내어 줌 에 따라 100여 년 만에 우리 품으로 돌아 오는 용산을 어찌할 것인가가 국민적 관 심이 되고 있다. 이제 해방촌도 그 운명 을달리해야하는시점에처할지도모른 다. 북악에서 종묘를 거쳐 남산에 이르 는 녹지축을 한강까지 잇고자 하는 바람 이많은공감대를형성해가고있기때문 이다. 해방촌이 그 길목을 지키고 있기 해방촌 전경 에눈앞에펼쳐진이풍경도우리시야에 서사라지고, 어느때인가기억에서마저 지워질지도 모른다.‘남산 제 모습 찾기 운동’ 전개되면서 폭파 공법으로 화려 이 하게 사라졌던 남산 외인아파트처럼 해 방촌도 우리의 기억 속에서 날려 보내야 할곳일까? 해방촌의 마지막 흔적, 호국신사 터 해방촌은 오늘의 우리 삶을 일궈낸 현 장이있었던곳이다. 註 1) 영국 왕립지리학회 소속 지리학자로 1894년부터 1897년 사이에 4차례 조선을 방문한 후, 저서 <한국과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를 남겼다. 2) 10인의 위인``:``이순신, 세종대왕, 을지문덕, 사명대사, 김유신, 강감찬, 계백, 광개토대왕, 김춘추, 윤관 3) 1969년 9월 23일 건립 4) 1969년 8월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회 건립 5) 1969년 9월 성재 이시영 선생 동상건립위원회 건립 6) 현재 교육과학연구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7) 우남은 이승만 전 대통령의 호 8) 1970년 10월 26일 개관 ‘빛깔 있는 책’ 유명한 출판사 대원사의 주차장이다. 으로 9) 본 글의 후반부는 <문화와 나> 2004년 겨울호 ‘근현대 건축 순례-남산편’ 게재된 글입니다. 에 290 건축과 사회
  • 10. 10 12 9 11 7 6 5 4 3 8 2 1 답사 경로 「건축과 사회」 2005 봄 / 새건축 도시 건축 답사`:`남산`-`해방촌 식민지배의 흔적과 해방·분단의 산물 해방촌 -` 안창모 경기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 교수 답사 시작점, 성곽이 위치했던 힐튼호텔 건너편 축대 위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신궁 터로 정지되었다. 백범 광장의 백범 김구 동 구 어린이 회관과 구 조선 아동 공원 오르는 길, 이 곳은 성밖이다. 구 어린이 회관에서 바라 아동 공원에서 바라 본 서울 전경 안중근 의사 기념관과 동 김유신 장군 동상, 애국선열 조상위원회에 의해 건립된 유신시대 무인 동상 구 조선신궁 터, 조선신궁 식물원이 위치해 있다.
  • 11. 13 14 15 16 17 18 19 범 김구 동상 구 조선신궁 본전 터에서 바라 본 신궁 터 해방촌 신흥시장, 거리에서는 보이지 않는 숨은 시장이다. 과 구 조선신궁 계단 독일 문화원 해방촌 신흥시장 내부 전경 에서 바라 본 서울 전경 해방촌 전경, 대원사 주차장, 해방촌(근경)과 용산(원경) 전경, 왼편의 뾰족한 교회탑이 해방촌과 역사를 함께 한 해방교회다. 해방촌의 마지막 흔적들(구 호국신사 터) 해방촌 가는 길 구 호국신사 계단 념관과 동상, 콘크리트로 재현된 한옥 기념관 조선신궁 본전이 놓였던 곳에는 현재 있다. 해방촌의 중심, 해방촌 오거리 해방촌 신흥길